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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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벌판의 오래된 아궁이 앞에서 편한 자세로
장작이 타는 다비식의 훈훈함에 몸을 녹이고 있는데
그게 함박눈 내리는 밤이라면
강은 눈송이 이불을 덮으며 조용히 흐르고
나무토막이 탁탁 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형체를 소각하는
환하고 맑은 열기는 나를 참선으로 이끌겠지
가마솥 뚜껑을 떠밀고 올라와 증발하는 인연의 수증기는
캄캄한 공중에서 하얀 눈가루가 되어 강물에 떨어지는 걸 보면서
나 또한 저 장작처럼 활활 타서 소각되는
향긋한 해체의 날을 두려움 없이 예감하게 되겠지
그래도 속세의 인연들을 한꺼번에 다 지우기는 서운해
더 태워야 할 무엇인가를 조금 남겨놓고 가는 건 어떨까
그러니 이렇게 된다면 좋겠지
죽어서 내가 나무가 되고 내 몸의 가지 하나를
그대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꺾어서 집에 가지고 간다면
그 가지는 쓸모가 없어 방치되어 있다가도
이삿짐에 끼어 계속 그대를 따라다닌다면
언젠가는 그대도 내 숲에 사는 한 그루 나무가 되고
그때 무심한 새들은 내 나무에서 그대의 나무로
노래하며 즐겁게 날아가곤 한다면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우리의 숲이 벌목된 후에
어떤 한적한 곳의 아궁이에서 우리가 만나 함께 타게 된다면
그 밤에도 펑펑 눈이 내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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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시대님의 댓글

등단이다 뮈다 그러는 시인의 향기 시보다
몇수위의 깊이가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