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남부선을 걷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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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남부선을 걷는 오후
봄이 오시는 장산 초입
세 갈래 길을 알리는 이정표를 지나 산길을 걷는다.
봄이 보이는 해운대 우동
내 곁으로 노인이 다가온다.
옛 철길이 어딘지 아시는지, 묻는 내게
아 폐쇄된 동해남부선 말이군요, 내가 잘 알지요,
엷게 웃으며 일러주는 우연히 만난 노인과 동행이 되어 옛 철길을 걷는다.
유채꽃 조팝나무 회양목 영산홍들로 치장한 옛 철길 산책로엔
저마다 생각에 잠긴 채 오가는 사람들로 붐빈다.
버스들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버스 정류장 옆 이팝나무에 꽃이 하얗게 피어 있다.
올해 농사는 풍년이겠구먼, 노인이 한 마디 툭 던졌다.
한참을 걷다가 폐쇄된 해운대역 대합실 뒷문에서 노인과 헤어졌다.
나는 노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해운대 옛 역사驛舍를 뒤로하고 청사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미포가 눈에 들어온다.
'동해남부선 폐선부지'라고 적힌 모형 기차 앞엔
나무로 된 그네 의자가 덩그러니 흔들리고 있다.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의자는
산과 바다 사이를 오가며 사람들의 추억을 훔치고 있다.
영원을 평행선으로 달릴 것 같은 철길을 걷다 보면
가끔 새들이 내 머리 위로 날아가고 꽃들은 듬성듬성 철길에 누워있다.
행인들이 두고 간 뿌리 잘려진 조화들이다.
진짜 꽃들은 바위와 넝쿨 뒤에 숨어 있다.
오른 귀엔 파도 소리를, 왼 귀엔 수풀의 바람 소리를 들려주는 철길 위에서
불행은 딴 세상의 일인 것 같다.
큰 바위 너머로
옛 해안경비철책이 찢어진 채 구부정하게 서 있다.
철책을 지나니 청사포 등대가 눈에 들어온다.
푸른 뱀이라는 뜻이 좋지 않아 푸른 모래를 가진 포구로 개명했다는, 청사포.
철길을 배경으로 외로이 서 있는 등대는
저만치 지는 해 비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등대보다 더 오랜 세월 바다를 바라보았을 철길에겐
나무 밑동처럼 잘려나간 슬픔이 있고 내게는,
아픈 발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
댓글목록
tang님의 댓글

환희와 대면하는 환의 얼개
열락의 힘이 동인이 되어
천천한 있음을 대면합니다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말씀 감사합니다.
여름날 건강하시고,
좋은 시 많이 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