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으로부터 온 편지(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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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492회 작성일 21-08-11 15:54본문
간이역으로부터 온 편지
오랜만이로군요.
요 며칠째 겨울비가 내렸습니다.
하릴없이 지나간 기억들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비는 그칠 줄 모르더군요.
앙상한 시(詩)라도 써 볼까 했지만 좀처럼 시(詩)가 되질 않더군요.
지난밤엔 철도원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내내 기찻길 위로 눈이 내리는 영화더군요.
슬픈 눈송이처럼 어린 딸을 잃고
또 착하고 순한 아내마저 떠나보낸 남자의 일생.
마지막 장면까지도 눈으로 덮이더군요.
인생은 무엇일까요.
다 타버린 마음 같은 석탄을 들이부으며
처음 기차는 가고 또 다음 기차는 오는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런 눈덩이들 굴뚝에다가 퍼붓는 그것일까요.
왜 우리의 주인공은 항상 고되고 슬퍼야 하는 걸까요.
지금은 날도 차고 어두운데
불 위의 작은 양은 냄비에서 숭늉이 끓고 있네요.
눈 대신 가랑비 내리는 이 밤
숭늉은 눈치도 없이 냄비의 어깨를 타고 넘쳐흐르는군요.
아주 오래되고 낡은 이야기지만 믿음에겐,
끝내 보답이 따른다고 아버지가 일러주셨지요.
모든 바라는 것들의 보이지 않는 보답이.
눈에 덮인 채 쓰러진 철도원의 등을
무심히 카메라가 원테이크로 잡을라치면
들판 저 멀리에서
최후의 마음 같은 석탄을 또다시 퍼부으며
눈길 속으로 스크린 속으로 기차는 사라집니다.
당신은,
나의 마지막 남은 착한 당신은 여전히 잘 지내시는지요.
어쩔 수 없이 또 한번 더 겨울입니다만
눈도 없이 빗줄기만 훌쩍이는 현실의 나날입니다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일생 견딤의 날들을 걸어간
기찻길 위의 저 굳건한 등짝을 바라보아야겠지요.
그래야만 밤을 꼬박 새워 내린
저 빗방울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테니,
그래야만 뜨거운 것이 내 눈에 고여도 슬프진 않을 테니.
그럼, 철길처럼 굳건하시길 빌며
인생 가까운 간이역으로부터.
댓글목록
김진구님의 댓글
김진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가슴 뭉클합니다
좋은 시란 이래야 된다는 걸 깨닫습니다
천천히 음미하며 잘 읽었습니다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말씀, 제가 더 감사한 마음입니다.
남의 마음에 물 한방울만큼이라도 파도를 일으켰다면,
그 시는 이미 행복에 겨운 거라 생각합니다.
좋은 저녁 되시길 빕니다.
스승님의 댓글
스승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서술형으로 문장을 이끄는 힘이 좋습니다.
함축과 절제미가 돋보이는 시를 한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댓글 감사합니다.
건강, 건필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