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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35회 작성일 21-11-19 02:48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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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봄비
후박나무 가지가 연록빛에 감싸인다. 보드라운 연록빛 표정이 단단한 껍질의 상징을 찢는다. 그리고 화알짝
펴진다. 투명한 물방울 듣는 널찍한 새잎 후두둑하는 소리. 너른 흰 돛 타고 또르르
굴러내려간다. 그 소리 사라져가는,
흔들리는 새잎과 새잎들 몽롱한 자리. 젖은 벽돌담. 점차 고여가는 물 웅덩이 속으로
목련꽃 하나 둘 비쳐온다.
2. 여름비
마루에 앉으면 풀비린내와 검은 메타세콰이어 잎 체취. 청록빛으로 더럽혀진 마루에 쨍!하고 쏟아지는 유리조각들.
잎과 가지들 메스처럼 썩썩 자르며
직하하는 예리한 햇빛. 잎의 표면은 불타오르고 짙은 녹음은 한없이 깊다. 후두둑 비가 내린다. 잠시 어두워지다가
하늘은 비린내 역한 내장을 지상에 내던진다. 몸부림치며 낮은 곳으로 몸을 내던지는 노한 물의 아우성. 네가 죽은 지
이미 일년이다.
3. 가을비
가을길을 지나 집으로 왔다. 잎들은 하나 하나 진홍빛, 잎들의 흔들림은 사각사각, 메마른 외로움이 뿌리부터 썩은 흙을 붙잡고 있었다.
길 위에 아무도 없었다. 가을비에 잎이 말라가고 있었다. 높은 데 가지는 거기 멎어 있었다.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지지도 않고 가지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잠시 서서 가지를 올려다보았다. 잎들의 진홍빛은 어느 때는 노란빛깔을 띠다가 미세한 빛깔들의 스펙트럼을 거쳐 어디론가 떠나가는 것이었다. 빗줄기 조용한 속으로 떠나가는 것이었다.
4. 겨울비
앙상한 가지들이 눈의 결정이 되어 버렸다. 명징한 추위. 채찍을 휘두르듯 차가운 공기가 내 신경 속으로 찌리릿! 파고들러온다. 아프다. 옹송그린 깃털 안에서 잿빛 폐선을 품는다. 잔뜩 움츠린다. 윙 윙 귀가 떨어지고 망막이 베이고 발 끝의 감각이 사리지는 황홀. 딱딱한 바위가 되어가는 아침. 작게 웅웅거리는 소리 들려오더니 따스한 빗줄기 굳은 살 속으로 파고든다. 빗줄기가 내게 속삭이지 않는다. 다만 조촐한 비늘로 내 통각을 어루만질 뿐. 빗소리는 가지에 덮인 눈 속에서 흙 위에 덮인 눈더미 속에서 담 아래 잔뜩 웅크려앉은 고양이 심장 속에서 나직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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