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공 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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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싣딤나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329회 작성일 22-01-09 22:03본문
멸공을 외치는 사람들,
시대 착오는 주행 착오를 부른다.
공산주의를,
최소한의 공산주의를 알기만 해도
대선주자가 멸공을 외출수는 없다.
공산주의의 어원인 콤뮤네는
라틴어로 나눔, 사귐을 의미한다.
이 세계는 원래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공산주의 공동체이다.
살아 있다면 모두가 함께 나누라고,
분배의 정의는 나눔의 정의다
왜 햇빛은 그대에게만 비치지 않는가
분배의 정의는 이 세계의 본질이다.
멸공 인증샷을 날리는 그대,
이 세계를 함께 나누고 누리는 의지를
멸할 것인가?
이제 그만하라,
배울만큼 배운자들이 진실을 오도하는
일들을 그만하라.
멸공은 멸치콩이 아니라,
그대에게서 공산주의에 대한
오해를 멸하는 것이다.
파랑과 빨강을 섞으면 보라라는
고귀한 색상을 얻는다.
아름다운 것은 섞으라,
추한 것은 멸하라,
추한 것은 그대들이 얻고자하는 것이지
공산주의가 아니다.
공산주의가 이 인류의 평등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를 모른다면
그대 자신을 지식인이라 부르지 마라,
아이들이 눈싸움을 했다고
눈은 더럽고 나쁜 것인가?
현재는 모두 과정이다.
그 많은 현재들이 쌓이고 쌓여
내일이 온다.
멸공이 아니라 추공이다.
추구하라, 공산주의를
자본주의는 차선이지 최선이 아니다.
가능하다면 우리는
이 세계를 공평하게 나누고
공유할 이유가 있다.
멸공은 단연코 역주행이다.
멸치 국물은 그만 우려 먹고
몸에 좋은 콩은 그만 볶으라
댓글목록
싣딤나무님의 댓글
싣딤나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공산주의는 남침을 하던 북한이나 북한을 도와 인해전술을 벌이던 중공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의 불평등, 더 나아가서는 모든 생명체들의 불평등에 대해 던지는 의문 이였고,
답이였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공산주의에 맞지 않다는 판단은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그릇된 편견 입니다.
내 욕심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 이웃과 작은 무엇이라도 나누고 공유 하고자 하는 인간의 깊은,
사회적인 본성을 부정해서는 않될 것 입니다. 다른 모든 생명체들이 진화 한다면 우리들의 의식과
정신과 영혼 또한 진화 하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신이 우리를 이끌어 간다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실예를 들자면, 공산주의를 외친 최초의 세력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신 앞에서 우리는 똑 같다는 의견 입니다. 신 앞에서 똑 같기 싫었던 세력은 바로 내가 신이라고 믿는
독재의 근본 세력 입니다. 공산주의는 우리 인류가 꾸었던 가장 아름다운 꿈 중의 하나 입니다.
우리가 그 꿈에 이르지 못했다고, 우리가 꾸었던 꿈에 침을 뱉어서는 않될 것 입니다.
더구나, 한때의 과정적인 착오를, 시해의 착오를 프레임을 쓰워서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더구나, 그런 정치 놀음에 더 이상, 인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자각과 자유와
자아를 허비 해서도 않될 것 같습니다. 부끄러움을 이제는 알 때 인 것 같습니다.
싣딤나무님의 댓글
싣딤나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선거때만 되면 반복되는 색깔 공세와 색깔 프레임,
왜 그대는 샐러드도 먹고 김치도 먹나요?
시간의 누적이란 시간이 누렸던 좋은 것에 대한 선택의 누적 입니다.
무슨 주의적이라는 프레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주의가 표방하는 것이 인간에게 실제로 어떤 해를 주고 득을 입히는가 입니다.
프레임 놀이는 가장 더럽고 목적에 충실한 집단들이 되풀이 해온
민중계몽이 아니라 민중 악몽 놀음 입니다.
민중들에게 증오와 미움과 편견을 심는 악몽 놀음 입니다.
이제 우리도 알만큼은 압니다.
그만 놀아 납시다.
우리에게 익숙한 생각과 인물들에게서 놓여 납시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시간이 만든 애증에서 벗어나여 합니다.
증오하면서 사랑하는 것,
감정은 단어만 바뀌었지 똑 같은 에너지 입니다.
증오 하지도 그 증오가 바뀐 사랑도 말고,
냉정하게 사실을 직시 해야 합니다.
긴 겨울 지난 봄 같은 사랑을 우리는 해야 합니다.
이제 최선이 있다는 것도 믿지 맙시다.
차선 중 가장 나은 것이 최선 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진화 해왔습니다.
요즘엔 굳이 액자에 사진을 넣지 않습니다.
휴대폰에 그대로 저장 하거나
다이소에서 파는 나무 집게로 삼끈에 걸어 둡니다.
액자는 그 그림의 계급이고 부류이며 한계가 됩니다.
더 이상 정치적으로 액자를 이용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진부한 프레임은 진실한 그림을 망치기 때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