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남은 자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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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싣딤나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6건 조회 307회 작성일 22-04-12 11:42본문
라면과 소주를 사려고 편의점으로 향하고 있었을 뿐인데
가로수들을 온통 꽃으로 뒤덮어놓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가는 길바닥 깨진 틈새들도
민들레, 제비꽃, 개미자리 따위의 소소한 꽃들을 피워 놓았다
심지어는 담배나 한 개피 피우려고 앉은 간이 의자 옆
버려진 콩나물 통에까지 유채꽃 한 아름을 준비해 둔 것이다
여름에는 여름대로
가을에는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또 하루, 용케도 살아남았다고,
구름 위에 무지개 프랭카드를 내걸고
지나다니는 길에 빨갛고 노란 색종이를 뿌려대고,
완성한 조각상에 덮어 놓은 흰 보자기를
천천히 벗기듯 눈에 덮인 뻔한 동네를
일생일대의 걸작인양 개봉하기도 하고
이제는 레파토리를 얼추 꿰고 있어
새삼 깜짝 놀라는 체 해주기도 예삿일이 아닌데,
저 벚꽃 다 지고 나면
터덜터덜 돌맹이를 차며 돌아오는 퇴근길에
수령 동지를 맞는 북한 여학생들처럼
붉은 철쭉들의 카드섹션을 준비하고 있겠지,
뭐 어떠랴
저렇게까지 성화인데
못이기는 체하고 어깨 한 번 펴보는거지,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처럼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어주는거지,
트렁크에서 백개의 풍선이 날아오르고
아이들이 던진 오자미에 흠신 두들겨 맞고
게슴츠레 벌어진 바구니에서 하얀 비둘기가 날아오르듯이
눈을 뜨면 백개의 후레쉬처럼 일시에 터지는 빛이여!
공복에 짜르르 번지는 소주 한 잔,
나는 죽어라고 독이나 들어붓는데
세상은 나를 위해 날마다 이벤트라니,
댓글목록
힐링님의 댓글
힐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세상은 나를 위해 날마다 이벤트라니
마지막 행이 절창입니다.
이 한 문장으로 세상을 압축하다니요
뛰어난 감각에 놀랐습니다.
큰 박수를 보냅니다.
심딤나무 시인님!
싣딤나무님의 댓글
싣딤나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를 어렵게 쓰야 뭔 상이라도 탈 텐데
ㅎㅎ 저는 뻔한 시밖에 않되네요.
고맙습니다. 힐링 선생님
하늘시님의 댓글
하늘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봄날의 이벤트에 덩달아
어깨가 펴집니다
어지러운 세상에 시라도 편하게 읽을 수 있어야지요
열일하고 퇴근하면 숨차기도 하지요
싣님나무님 시는 살아 남은자가 편히 공감할수
있어 좋습니다
싣딤나무님의 댓글
싣딤나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감사합니다. 하늘시님! 요즘 하늘시님의 시가 그야말로 하늘에 닿는 것 같아
부럽고 부럽습니다. 천을 뒤틀어 약을 짜내듯이 진한 시를 쓰고 싶은데
이제 제 안의 시를 너무 우려 먹었나봅니다. 슬쩍 약 냄새만 나는 맹물 같아
부끄럽습니다. 늘 좋은 시 잘 읽고 있습니다.
싣딤나무님의 댓글
싣딤나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나부끼는 꽃잎도, 떨어지는 낙엽도, 청소부 아저씨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쓸어야 할 쓰레기 입니다.
그게 좋다고, 예쁘다고 사진도 찍고 한 장 줏어다가 책갈피에도 꽂기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과 나누려고 썼다고 생각하시기 바래요. ㅎㅎㅎ
좋은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블랙캔버스님의 댓글
블랙캔버스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코코하느라 몇일 고생을 하고 읽습니다.// 잘 감상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