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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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길을 걷는다
서류의 끝과 끝을 겹쳐서 찍고 또 찍은 인감처럼
무슨 큰일이라도 내려는 듯이 찍히는 발자국들
얼마나 따뜻한 날들만 살아서
나는 변변한 발자국 하나 없었던가?
뒷걸음쳐서 신어도 될 것 같은 발자국 한 짝,
갈대를 깍아 썼다는 쐐기문자가 한 페이지인데
뜻을 굳히기 위해 불위를 걸었을까?
점점 굳은 살 박혀 가는 발바닥이
아직은 말랑한 점토판 같아
동상 걸린 발볼을 손톱으로 꾸욱꾹 누르고 누르면
천년이 지나도 흩어지지 않는 문장 한 줄 새길까?
시간처럼 눈이 쌓이고,
두려운 발을 짐승의 가죽으로 싸매고
뽀드득뽀드득, 신발 밑창만 으깨며 걷는다
녹은 눈이 천년처럼 흐르면 흔적도 없을
남의 문장을 베끼고 또 베끼며 걷는다
눈 내린 길을 걷는다
멀리서 보면 누군가 비뚤비뚤 끌고 가고 있을 문장,
글자 한 자마다 천년의 상처를 품은, 그래서
나는 눈 내린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댓글목록
싣딤나무님의 댓글

모두들 안녕하신지요. 올해 부터는 1일 1편 시를 쓸 야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시가 되게 살고 싶군요. 새해 복들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너덜길님의 댓글

일터에서 돌아와 시마을 둘러보다가
너무나 반가운 이름이 첫눈처럼 내 속으로
들어왔답니다.
'얼마나 따뜻한 날들만 살아서
나는 변변한 발자국 하나 없었던가?'
훅 들어오는 일갈에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시의 피부와 심장이 여전하신 것을 보니,
참 안심이 되고 좋습니다.
올 한해 두고두고 그 발자국 위에 저의 발자국을
얹어보아도 괞찮겠지요.
건강, 건필을 빕니다.
싣딤나무님의 댓글

아이구! 이게 누굽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하도 오랫만에 와서 모두 잊으셨나 했는데,
정말 지금의 제 표정을 보여드리고 싶네요.
글썽글썽 빛나는....
참 힘들고 외로웠습니다.
다시 시를 쓰기로 해야 할 만큼요.
건강하시죠?
오랫만에 쓰보는 것이라
참 힘도 들고, 한심스럽기도 했는데
좋게 읽어주시니, 힘이 납니다.
새해에도 시 많이 씁시다.
늘 시를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이것이 복인것 같아요.
이장희님의 댓글

시인님의 예리한 문장을 오랜만에 감상 합니다.
어디하나 작은 것에 소홀히 하지 않으시는 시인님에게
뭔가 배울 것 있는 시로 남을 것 같네요.
좋은 시 잘 감상하게 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늘 건필하소서, 싣딤나무 시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