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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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153회 작성일 24-02-02 11:02본문
사랑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대략 35년 전 현장 설치 공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들른 양산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공중화장실에서 나는 오줌을 누며 이런 생각에 잠겼었다.
내 나이 갓 스무살을 넘기던 무렵이었다.
남의 공장 설비 일을 하며 나라는 공장을 가꾸던 젊음에겐 늘 다짐과 보이지 않는 희망 같은 것들이 옷자락처럼 따라다녔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오후, 먼지 이는 작업대 구석에서 드릴 작업을 하다 내 오른손 넷째 손가락 두 마디가 면장갑의 마디와 함께 떨어져나갔다.
작업대 밑에 널브러진 그것을 주워들고 나는 의사에게로 갔다.
의사는 잘린 손가락을 엷은 웃음과 함께 살펴보더니 아주 잘 들고 왔다며 소독하고 마취한 후 바늘구멍만큼의 아픔만 남긴 채 접합해주었다.
나는 실밥 자국이 손금처럼 남아 있는 그 손으로, 내 먼지 묻은 저녁의 발과 손과 얼굴을 씻었다.
내 아내의 물기 스민 손을 매만졌으며 딸과 아들들의 귀와 얼굴을 꽃잎처럼 쓰다듬었고 퇴근길가에 핀 메마른 쑥부쟁이를 잡아보았고 친구처럼 함께 낡은 오래고 해진 책을 넘겼고 저녁노을 스르르 낄 때면 어눌한 시를 썼고,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가끔 아리고 제대로 굽어지지 않는 손가락을 보며, 이렇게 늦은 밤 사랑이 뭔지를 적어보려 애를 쓴다.
애를 쓴다.
댓글목록
수퍼스톰님의 댓글
수퍼스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상처의 흔적이 남은 손으로 소중한 가정에 지지 않는 사랑의 꽃을 심어 피웠고
세상을 들여다보며 마음을 꺼내 놓는 작업을 그 손으로 하셨네요. 헤아릴 수 없이 넘겼을 세상의 페이지,
그래서 이런 옥시를 탄생시키셨나 봅니다. 감동입니다. 늘 건필 하소서.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늘 좋은 말씀으로 시마을을 지키시는
시인님께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습니다.
오래전 일이라, 전에 썼던 시를 새롭게
써 봤는데, 좀 아쉬움이 남습니다.
두고두고 고쳐가며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공감의 말씀 감사합니다.
시인님의 건투를 빕니다.
창가에핀석류꽃님의 댓글
창가에핀석류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 상처, 그 흔적을 사랑의 훈장이라 말하고 싶군요.
젊음을 바쳐 열심히 써 내린 삶의 기록이, 대대로 흘러,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질 사랑 ...
고맙게 읽고 갑니다.
너덜길 시인님~
늘 건안 건필하시길요~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늦게 읽게 되어 이제사 고맙단 말씀 드립니다.
요즘 시마을의 분위기 너무 좋습니다.
거기엔 시인님의 왕성한 필력도 한몫하구요.
모든 일 잘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