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경비원의 하루
페이지 정보
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182회 작성일 24-02-12 10:01본문
어느 경비원의 하루
30년을 함께한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다녀올게, 눈빛 교환 한번 해야지.
출근하는 도로 난간 옆 매실나무 가지가 찬바람에 부르르 떨고 있다.
그를 지나 느티나무 둥치를 눈으로 만지며 지하철역을 향한다.
멀리 십자가가 눈에 들어온다.
괴로웠던, 그러나 행복한 사나이를 생각한다.
지하철 게이트를 자그마한 동백전 카드가 통과시켜 준다.
나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디지털 시계가 일곱 시 십 오 분을 표시하고 있다.
잠이 덜 깬 눈들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가는 삶 오는 삶.
기차는 앞모습과 뒷모습을 보이며 내 앞을 오간다.
휴대폰 외엔 세상이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그에게 눈을 박고 있다.
얼비치는 차창의, 이파리처럼 흔들리는 나의 전신을 본다.
나의 자세는 너의 자세와 다를 거라고, 배에 힘을 주고 상체를 곧추세운다.
지하철을 나와 아파트 곁 스물 다섯 그루의 메타세콰이어를 바라보며 걷는다.
지금껏 몰랐다.
저들이 그 나무인 것을.
삼나무로 착각하고 이 년을 보냈다.
첫눈 내리던 어느날 호위무사처럼 눈송이들을 맞이하던 그들을 보며 나는 문득 그들이 메타세콰이어일 거라는 생각을 해내었다.
미안했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해서,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해서.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
불현듯 옛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그들 우듬지에 자리한 세 개의 까치집이 세상의 마지막 희망인 양 앙상하게 매달려 있다.
어제처럼 비가 내린다.
언제나처럼 바람이 분다.
오래고 낡은 내 구둣발이 풀이 죽은 낙엽들을 차고 지나간다.
아파트 2층 동백꽃이 마지막 하나 남은 꽃송이를 매달고 있다.
배롱나무는 빨간 꿈을 꾸는 듯 살짝 몸을 젖히고 있다.
어서 오라고 눈짓하는 만리향은 둥치와 우듬지가 동시에 흔들린다.
아이들이 생각났다.
안녕 내 영혼을 다녀간 꽃봉오리들아.
상류와 하류처럼,
멀리 떨어졌으나 끝내 이어져 있을 마음들아.
너희들 파란 마음이 앉고 서고 놀던 자리.
회색빛 생각을 하늘빛 생각으로 바꾸던 놀이터에서,
윤슬처럼 반짝이던 아이들아.
그 곳 상류에서도 빛나기를.
내게 투명한 즐거움을 부어주던 은빛 물고기들아.
저 연어들처럼,
탁류의 세상 박차고 오르기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른들보다 순전한 지혜를 무심히 부어주던
내 착한 쑥부쟁이들아.
햇살을 받아 든 산등성이 물푸레나무에게처럼
마침내 푸르디푸른 축복 너희게 닿기를.
서울로 이사 가던 날 함께 사진을 찍자며 로비 근무 서던 내게로 와 주었던 아이들에게 나는 이 시를 적어주었다.
줄 게 내겐 이것 밖에 없다며.
과학고에 진학해서 휼륭한 여자 과학자가 되겠다던 현아.
처음 막막하던 내게, 아저씨 고마워요,라며 고마운 손편지를 주었던 윤아.
클레멘티 소나티네 악보책을 보이며 환하게 웃던 연아.
홈플러스 간이 공연장에서 어른들과 합주했다며 자랑하던 원아.
비 오는 날 엄마와 함께 비를 맞으며 비처럼 미소 짓던 진아.
난 몰라요 밖에 모르는 꽃송이 같은 지원아.
주먹인사 날리며 씩씩하게 인사하던 준아.
아저씨, 밝아지려는 마음이 더 아저씨를 밝게 만들어요, 어른 같은 말로 나를 가르쳐주던 유야.
작은 포스트잇에 내 초상화를 그려주곤, 아저씨 신분증이예요,하던 내 착한 아이들아.
내 시를 너희들에게 보낸다.
정문 게이트를 열어주면서 나는 후문 게이트의 안위를 생각했다.
드나드는 차들의 얼굴과 뒷모습을 보면서 바퀴의 표정을 생각했다.
여러 모양 여러 생각, 그러나 한번의 하루.
그 하루를 뒤로하고 아파트를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사람들과 하품을 지나 집 초인종을 누르면 들리는 소리.
잘 다녀왔어요?
아내의 30년 묵은 사랑이 내 심장을 지그시 누른다.
저녁은 깊고 구기자차는 맑다.
댓글목록
수퍼스톰님의 댓글
수퍼스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어느 분에 대한 하루 삶의 영사기를 돌려 놓은 듯 아날로그의 화면이 시인님의 시에서
크로키 작품처럼 흘러갑니다. 아이들에게 적어주신 시가 일품입니다. 시에서 아이들을 향한 사랑이 짙게 배었습니다.
이 시를 받은 아이들은 세월이 흐른 뒤에라도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사랑과 아내 분의 30년 묵은 사랑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좋은 시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감사합니다.
별 것 없는 삶이지만,
묵은 사랑만큼은 매실청처럼
보존하고 싶습니다.
시인님의 하루도 그러하시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