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락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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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97회 작성일 24-03-21 00:39본문
싸락눈
오쿠니(阿國)가
새하얗게 가느다란
손가락뼈들로 남았다기에,
으스름한 그녀의 寶池 속까지
이어진 나의 탯줄을 움켜쥐었다.
한 줄
한 줄
이끼 낀 화강암 계단을 올라가면,
주홍빛으로 난도질 당한
발가락들을 감추는 오쿠니(阿國).
옹크린 산길 톡 톡 건드리는
싸락눈 섞인 겨울바람.
펼쳐 놓은 비단자락을 거두어들이듯
나부끼는 차가운 비석들.
그녀의 실루엣은
누가 내 망막 위에 예리한 끌로
무수한 흰 나비떼들을 새겨 놓은 듯,
산산이 흩어져 제각기 날아가 버린다.
아, 배고파.
오쿠니(阿國)는
붉은 기둥으로 머리를 두른
신사의 품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얼음결정들은 서로 영롱하느라 조금은
샤미센 소리를 닮은
빛에 닿아 투명한 단면들
섬세하게 서로 다른 음향으로 울려오고,
내 귓속으로 흘러들 때
종(鐘)소리가 무겁게 가라앉는 심해 속의 춤.
조심 조심 치마 속 웅크린 버선발이 되어 버린
공주의 이야기.
예리한 칼에 베인 엄지 손가락이
복숭아 향기를 내었다는 이야기.
여자는 동종에 머리를 부딪쳐 머리가 깨져 버리고
목 잘린 해조음(海潮音)이 곱게
곱게 접히는 소리.
비단버선이 가볍게
아미(蛾眉) 찌푸리며
형체 잃고 시취(屍臭)로 남은
싸락눈송이들 사이로
연한 자줏빛 스르르 번져나가고 있다.
떠오르는 희미한 초롱불들 하나 하나
아, 너에게 삼켜지면......
댓글목록
수퍼스톰님의 댓글
수퍼스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싸락눈 내리던 날,
그 옛날 가부키를 추었던 오쿠니의 실루엣을 찾고
그녀의 흔적을 담아 한 편의 시로 엮은 시인님의 주옥같은 시가
제 마음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킵니다.
감사합니다.
코렐리님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즈모에 갔을 때 인적 없는 길을 혼자 걷다가 보니까 오쿠니의 묘라는 녹슨 간판과 함께 닳은 비석 하나가 있더군요. 오쿠니가 가부키의 창시자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 장소의 스산함과 신비함이 아주 기억에 남았습니다. 가부키 공연을 몇번 직접 보았더라면 더 깊이 있는 시를 쓸 수도 있었을 터인데,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