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똥 편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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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가 싼 똥으로 만들었다는 편지지에 편지를 쓴다
밤이 새도록 에둘러도 구차한 변명 밖에 되지 않는 편지를
참 많이도 쓰고 살았다
아침이면 유리병에 밀어넣던 것이 톱밥을 콸콸 솟구치며
기계톱에 쓰러져 가던 나의 비명인 줄도 모르고
온 세상 해변에서 배꼽이 보이는 운동복을 입고
이어폰을 끼고 달리고 있을 너를 얼마나 간곡히 기다렸던가
내 안에서 흔들리던 나무들을 모두 베어내고도
너에게 쓸 편지가 남아서,
이제는 편지지를 바꾼다
밀렵꾼들이 잘라 간 상아들은 모두 하늘로 팔려갔는지
코끼리의 몸무게로 돌아오는 퇴근길
보얗게 빛나는 별들에게서 오래 전 내 입냄새가 난다
거짓말도 잘 못하는데 내 코는 언제나 석자다
나는 어느샌가 하루 서너갑의 담배 연기를 코로 내뿜으며
석자나 되는 코로 일당을 세는 코끼리 아저씨가 되었다ㅣ
석자나 흘러내린 콧물로
다급한 불 겨우 꺼고 사는 소방수는 모셔가는 사람도 없다
남의 비명을 밥숟가락 위에 올리지 못해서
초원의 질긴 그늘로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는
어김없이 길바닥에 쌩똥을 지리며 살았다
아무리 질긴 그늘도 누군가의 배앓이로 데워지면
따뜻하고 부드러워 지는 것,
이제 코끼리 아저씨는 똥이 편지다
우리 밖에서 던져 주는 슬픔이나 기쁨이나 증오나
모두 재미로 던져주는 과자 같은 것,
어떤 과자도석자나 되는 코로 받으리
벌통처럼 부지런히 모아 둔 꽃냄새 듬뿍 발라서
넘어졌다 그 바닥 짚고 일어난 아이에게 주고 싶어
이제는 유리병에 코끼리의 똥을 밀어 넣는다
새끼 코끼리가 어미의 항문에 코를 밀어 넣고 꺼내어 먹던 똥을,
섬유질이 필요한 사자가 체면 구겨가며 먹던 그 똥을,
세상에서 가장 비싼, 한 잔의 여유가 되어 주는 그 똥을
이제는 온 세상 해변이 코끼리들의 화장실이 되기를
코끼리 똥으로 만든 편지지가 얇은 상아빛이다
코끼리 똥으로 만든 편지지에서 얇은 풀냄새가 난다.
댓글목록
정민기09님의 댓글

"참 많이도 쓰고 살았"습니다.
만 30대 중반이 갓 넘었는데,
저서가 50권이 넘다니ᆢᆢᆢ
콩트님의 댓글

죽기보다도 싫지만
아직도 사람의 거리에서
생똥을 지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를 감상하며
연둣빛 냄새 물씬거리는
파릇파릇한 위안을
시를 통해 얻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