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대학문은 붓다가 되어야 한다 - (제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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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대학문은 붓다(우리 인간의 본래 참모습)가 되어야 한다 - (제6편)
사문沙門/ 탄무誕無
5편에서 출입出入이 되는 건 깨침이 아니라고 바르게 밝혔다
이 언어의 속뜻은 붓다의 본체 공을 보고 싶으면 보고,
보기 싫으면 안 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입정入定은 의식과 속눈(마음의 눈)이 무얼 하든 자연스럽게 늘 공을 보게 되는 걸 말한다
내가 붓다를 늘 보고 있고, 붓다가 나를 늘 보고 있음이다
붓다는 나를 알아보고, 나도 붓다를 알아본다
깨침은 컸으나 언어는 너무나 작았으므로
깨침의 용사(用辭, 탈바꿈, 그 뜻을 완벽히 알고 활용/부림)로 파병波竝 불러들인 깨침의 언어는
중생에겐 심심甚深하다 못해 난견난오(難見難悟, 깨침의 언어는 깊고 묘하여 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깨치기는 더 어려움),
깨침이 없으면 알 수 없는 듣도 보도 못한 말(뜻)일 것이다
중생은 붓다(깨침의 언어, 선지직, 선각)를 식별할 줄 아는 눈이 없어 그렇다
고요한 데서 선공부(참선, 간화선)해서 깨친 선각先覺보다
요중 속(搖中, 시끄럽고 번잡한 곳, 가나오나 죽으나 사나,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선공부해서
깨친 선각의 붓다 가피력(붓다의 받침)이
백천만 배가 더 승勝하다(더 뛰어나다, 더 수승殊勝하다)
나는 그렇게 간화선(看話禪, 화두를 들고 하는 참선)을 간看해서
붓다의 본체 공과 계합契合했다
앉아서 간(화두 그리는 작업/ 화두 그리는 수행)하는 걸 배워
가나오나 자나 깨나 죽으나 사나,
행주좌와 어묵동정에서 그리고 그려 익혔다(물이 올랐다)
해서 붓다와 빼박(죽어도 빼도 박도 못하는) 오입悟入이 되었다
붓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붓다와 계합하려면 환경과 처소, 상황과 처지를 따지다가는(선택하다가는)
영원히 깨치지 못한다, 한참 뒤처져 보이지도 않던 죽음이
어느 순간 순식간에 앞질러 온다
사람들은 변화하는 것을 잘 알아 변화는 것을 물어보는 데는 사람들 눈이 기발한 데 반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영원불멸 우리 인간의 본래 성품(인간의 본래 모습, 붓다)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도 않고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집법(集法,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법과 상식)밖에 모른다
인간이 자기 자신(자신의 본래 모습, 참나)이 누군지를 모른다
그래서 자신이 무명인지, 미혹한지도 모른다
목숨을 빼앗는 분신分身과 살아나는 출신出身
두 가지 패를 완벽히 갖추고 있는 붓다,
한 번 제대로 깨치면 영원한 깨침으로써
집(執, 집착)도, 고통도, 병듦도, 모든 장애와 걸림, 그 어떤 무엇도,
그대로 이대로가 다 깨침,
붓다는 나의 공주(共住, 붓다는 나와 함께 살고 있다)
나의 노래, 나의 언어, 나의 글은 몸을 가졌다
현존(실존)하는 붓다의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내가 그것이 되었을 때 그것을 바르게 알 수 있다
학력이 보다 나은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스펙이 보다 나은 인성을 만들지 않았다
우리 인간이 배우는 학문은 인간이 죽을 때
어떠한 도움도 안 되고, 아무런 의지도 되지 않는 학문이다
우리 인간의 본래 성품(붓다)을 바로 아는 깨침이야말로
사후死後를 대비한 위대한 대학문
보다 나은 학문, 보다 나은 자기 계발啓發,
보다 나은 사람, 보다 나은 인성을 붓다가 만든다, 갈친다(가르친다)
미래의 대학문은 우리 인간의 본래 참모습(참나)인 붓다가 되어야 하고,
교재(깨침의 도구, 그림 재료)는 간화선(看話禪, 화두를 그리는 선, 화두를 들고 하는 참선)이 되어야 한다
간화선은 최저의 생활로 최고의 노력을 볼 수 있는 공부(최고의 경지, 붓다를 직접 볼 수 있는 공부, 만날 수 있는 공부, 붓다와 계합하는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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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모든 인간(만물)의 본래 얼굴,
모든 인간(만물)의 본래 성품, 모든 인간(만물)의 본래 고향,
모든 인간(만물)의 본래 부모, 모든 인간(만물)의 본래 스승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수많은 형용어와 수식어, 수많은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에 속지 마십시오.
붓다(우리 인간의 본래 성품)의 본체가 공입니다.
사전적, 학문적으로 배운 그러한 공이 아닙니다.
붓다는 발견의 영역입니다. 체험의 영역입니다. 계합의 영역입니다.
댓글목록
정민기09님의 댓글

"언어의 속뜻"을 파헤칩니다.
탄무誕无님의 댓글의 댓글

파묘
최현덕님의 댓글

법회의 노스님의 굵은 울림이 귓속을 파고드는듯
훌륭한 말씀 갑사합니다.
탄무誕无님의 댓글의 댓글

잘 오셨습니다.
굵은 울림이 파고든 건
현덕 님의 귓속이 훌륭해서겠지요.
너나들이님과
온라인에서 댓글로 티키타카 하며
막역하게 지내는 게 챠암 보기 좋더군요.
이것도 훌륭합니다, 2(투우).
해서 다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