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자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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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
검댕이보다 더 검은 빛깔로 멈춰 선 강이 우두커니 있던 곳
그 강둑 아래 억새와 함께 가난한 우리가 살던 곳
판자로 엮고 흙으로 쌓은 집들은 불도저 하나면 먼지처럼 사라질 것 같았던 곳
엄마는 하루의 노동으로도 하루의 삶을 웃을 수 없었고 아이들은 옆 동네 아파트 아이들의 하얀 피부에 주눅들어 습관처럼 둔덕으로 달려오던 곳
오래되고 낯익은 저녁과 함께 바람이 불어오면 땀과 한숨으로 뒤엉킨 하루가 고개를 숙이던 곳
흘린 코를 주섬주섬 닦으며 어린 남매가 바라보던 부엌에선 하루의 삶과 맞바꾼 보리밥이 익어가던 곳
흰눈처럼 쌓인 그것들을 이웃집 아주머니의 억센 손이 퍼올릴 즈음 저녁의 어스름을 뚫고 등이 휘어지고 살이 헌 걸인이 다가와,
배고픔으로 떨리는 파리하고 낡은 그녀의 손이 솥을 덮치면, 가시보다 쓰라린 아주머니의 밥주걱이 그녀를 할퀴던 곳
스르르 공동(空洞)으로 변해버린 마당에서 걸인은, 검은 낯빛으로 어린 남매를 잠시 쳐다본 후 바람에 밀려 억새풀 쓰러진 강둑을 걸어가던 곳
멀리서 새소리 들려오고 천년보다 길었던 노을의 삶이 스러지고 있던 곳
그러나 뒤따라 걷던 동생과 나의 눈 속으론 강둑 끝 포도밭 짙푸른 포도송이 비처럼 쏟아지던 곳
어느샌가 억새 지나 포도밭 지나 미루나무 위로 해가 떠오르던,
그, 곳.
문득 눈을 감으면......
내 우멍한 두 눈을 감으면
그 때 우릴 껴안던 노을의 속살이,
보리밥 익어가던 밥솥 밑 장작불이,
그리고 그걸 지켜보며 서 있던 포도빛 저녁의 미루나무가,
천천히 걸어와 내 맘에 드러눕는 곳.
댓글목록
고나plm님의 댓글

아득한 한때의 시간이 밀려오는 듯 합니다
강 억새 저녁 노을 판자
이런 단어들이 산산조각으로 널려 있어 한층 더
한구석으로 몰아 넣습니다
건강하신지요?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오랜만이로군요.
눈이 내리고 비가 내려도
우리들 삶은 흘러가고,
시는, 그 심장을 읽으려 하겠지요.
겨울을 읽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판자촌 시절,
가난했지만 눈빛 반짝이던 마음이 그립구요.
늘 평안하시길 빕니다.
콩트님의 댓글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서 아직도 부산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한때는 무작정 이곳 부산이란 지명을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었지요
부산이란 지명이 너무 싫을 때도 있었습니다만
사람이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리는 일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희 3남매를 낳고 기르셨던 곳
결국엔 이 쇠창살 같은 뿌리에 갇혀 생을 마감하셨지요
부산은 산이 많아 釜(富)山이라고 명명했다는 얘기를 오래전 선친께 전해 들은 적이 있지요
자고 일어나면 산마루마다 판자로 지은 집들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열매를 열었지요
잊고 살았던 까마득한 그날의 기억들이 시인님의 시를 감상하며 행간 속에 제가 침잠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되돌아가기 싫었던 어두컴컴한 그 산마루 골목길을 오늘밤 떨리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훌쩍거리며 뛰어갑니다.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아, 그러시군요.
제 유년의 판자촌은 제 평생의
자양분입니다.
어쩌면 어두운 속에 빛은 더욱 빛난다는
교훈을 던져준 시절이기도 하구요.
항상 건강하시고 안녕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