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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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함
오늘도 그는 내 지갑속 현금을 모두 가지고 사라졌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익숙한 자전거를 타는 오후 4시의 그늘진 모습이다.
베란다 창으로 비추는 내 왼쪽 그림자는
빈 지갑처럼 배고픔으로 냉장고 앞을 서성거린다.
흐느끼듯 번져가는 시계 초침이 낭비되는 3차원들을
제 정비하듯 바삐 움직이다가 초침 소리로만
외면하는 나의 뒷모습을 이 모든 게 판타지가 아님을
날카롭게 찔러댄다.
눅눅한 공허만 주워 담는 빈 소주병 안을 들여다본다.
저 멀리 말라버린 바다에 빠진 나의 피곤한 눈빛이 나를 올려다본다.
그것들을 뚜껑으로 다시 가두고 모아놓고 버린 시간들이
거울 속의 내 빛바랜 눈빛속에서 찡그리며
나를 바라다보고 있다.
어둠을 헤집고 그가 다시 돌아왔다.
세상의 어느 한곳으로부터 잔뜩 취한 채 드러누운
그에게 슬픈 미소처럼 다가가 그를 내려다 보았다.
밤 10시처럼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나는 부패해가며 스멀스멀 일어나는 시체벌레처럼
그의 목을 졸랐다.
발버둥치는 실핏줄이 가득한 그의 눈빛 깊숙한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포근함이 만발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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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나무님의 댓글

시에서 깊은 내공이 느껴집니다
한 줄 한 줄이 다 마음에 들어와 박힙니다
맛있는 시
잘 먹었습니다
너덜길님의 댓글

윗글 나무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우짜든지 자주 시마을에서
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깊고 푸른 시,
자주 올려 주시길 바랍니다.
포근한 나날들 되시길.
이장희님의 댓글

눈을 뗄 수 없는 시였습니다.
곳곳에 표현도 좋고, 눈이 호강하고 갑니다.
좋은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늘 건필하소서,허밍 시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