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금류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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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공덕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631회 작성일 18-02-22 11:58본문
팬 위의 반숙은 난각 속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7단으로 켠 전기 장판에 반숙면 상태로 눌러 붙어 가금류를 꿈꾼다
날개는 배추 겉 잎으로 퇴화 시켜야 하리,
줄을 묶고 꽁꽁 여며서 속배추를 품어야 하리
횟간보다 붉은 벼슬도, 더운 육계를 오아시스 삼아
강대상 수반처럼 미려하게 꽃꽂이한 깃털도
만도(彎刀)의 위엄을 뽐내는 발톱도 다 버리고
무엇보다 너!
흙바닥에서 좁쌀을 분간하고
벌거지와 모래를 쪼아도 포부에는 노란 해를 슬던
알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를
사느냐 죽느냐처럼 문제삼던 그 머리도 버려야 하리
겁도 없이 발가벗은 하얗고 순전한 무기력으로
팔팔 끓는 기름솥 앞에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에 속을 뒤집는
생의 끓는점 앞에, 절단된 발목을 모으고 엎드려야 하리,
한마리 오천원 두 마리 만원에도 팔려
어느 박봉의 만찬에 올라 목구멍에 끼여 있는 허기를
발밑의 때처럼 씻고 기름칠 해야 하리
물가가 다 올라도 시집 값이 오르지 않는 것은
소 돼지랑 다른 항렬, 금류(禽類)의 자부심이리,
횃대를 빼앗기고, 흙바닥마저 빼앗기고
똥을 맞으며 똥비를 내리고
한번의 독감에 싹쓸이 되는, 하늘 한번 본 적 없으면서
물한방울 먹어도 하늘이라고 위를 보는
사람의 공복이 하늘이라 끝내 날개를 버리지 못하는
후라이드 치킨, 양념 치킨, 삼계탕, 백숙
닭도리탕, 닭내장탕, 똥집, 닭발, 닭갈비
입맛대로 부위별로 다 있는 통닭집이 되는 꿈이
전기 장판 위에서 여전히 반숙이다.
댓글목록
동피랑님의 댓글
동피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후라이팬에 보름달 하나 익혔는데도 시가 이토록 찰지다니
역시 셰프는 덕수.
공덕수님의 댓글
공덕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백수 일기 같은 겁니다.
갈수록 뜨끈뜨끈한 전기장판이 좋아지는 걸보니
제 꿈도 다 깬 것 같습니다 그려..
서피랑님의 댓글
서피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절단된 발목을 모으고 엎드려야 하리
나는 왜 이런 표현이 안될까...
유쾌한 서술...우수수..
오늘은 닭들이 훼를 치네요,
공덕수님의 댓글
공덕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감사합니다. 서피랑님
어제는 종일 싸매고 누웠느라 답이 늦습니다.
저는 죽은 동물들이, 혹은 살아있던 동물들이
음식이 되는 과정에 늘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발목이 절단된 닭과 절단된 닭의 발들을 뜨거운물에 불려서
비늘과 남은 털을 뜯어내는 일을 합니다.
돼지의 내장과 항문을 씻어내고 항문에 붙은 똥을
뜯어내기도 합니다. 아마도 늘 보는 것 만지는 것이
그것들이라 현장감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서피랑님께서 여기에 계신다면 정말 탁월한 시를
쓰내셨으리라 짐작 됩니다.
시에 대해 회의가 많은 요즈음입니다.
따뜻한 방문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