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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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시트 위에
팔 다리 없이 개나리꽃 물든 자국만 요란하였다.
퇴촌으로 가는 외진 길 이차로에서 사슴 한 마리를 보았다.
게시판이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유명산이라던가 명성산이라던가 아무튼 형체가 허물어지고 있는 거대한 산 곁을 지날 때였다.
죽기 직전까지 무릎을 세워
소반 위에 원고지를 놓고
병원비를 갚으려 시를 썼다는 노천명이 오늘 죽었다.
그녀의 오월을 따라
작은 길 하나에도 곁을 내 주지 않는
숲 안으로
숲 안으로
들어가노라면,
고가(古家) 한 채 숨어 있었다.
깨끗한 천으로 덮은
마룻바닥 호흡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어느 오월 밤
꽃을 따서 문 사슴이 병풍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적막한 사람들의 이야기.
불 꺼진 후박나무 가지에
수줍은 통증이 돋았다.
차갑게 뻣뻣한 발바닥이
이불 속 열기에 뜨거워질지언정,
텅 빈 혈관 안에 그리운 것들이 산수유열매 빛깔로 함께
썩어가는 늦봄의 소리.
사슴은 제 가슴을 절개해
벌어진 붉은 나무들 사이로 산의 소리를 듣고 싶었으리라.
이리저리 뒤척이던 노천명은
오월에 죽지 못하고 며칠 더 살다가
유월이 되어서야 죽었다.
퇴촌 가는 길 이차로에서 만난 사슴은
두릅순만큼만 자란 뿔 위에
이끼 돋은 소녀를 묻히고 있었다.
사슴은 먼 데 고개를 돌려
신호등을 지나가는 어떤
영원 비슷한 것과 시선을 나누고 있었다.
노천명이 죽기 전날 밤
그녀의 병실 안으로
명성산 숲이 들어갔다고 했다.
그때 노천명의 조금 벌어진
입 속에 뻗어나간
퇴촌 가는 길 이차로에는,
달빛이 사향냄새와 섞여 세모천의 물소리가
들렸을 지도 모른다.
숲 안으로
그녀의 발자국을 하나 하나 따라가다 보면,
산수유 열매 사태진
선홍빛 바람 속에 서정시처럼
고가(古家) 한 채 숨어 있었다.
댓글목록
존재유존재님의 댓글

망자의 삶에 대한 미련과 소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마치 사진을 보듯이 눈앞에 선명합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강녕하십시요
자운영꽃부리님의 댓글의 댓글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