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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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운영꽃부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335회 작성일 19-11-03 17:02본문
아마 내리는 눈송이들이 도시가 내는 소리들을 침묵 속으로 죽이고 있었나 봅니다. 맨해튼의 어느 거리에 낡은 유리창들이 즐비한 내 기억의 어둔 부분에 어느 밤 눈송이들이 사뿐사뿐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웨스트 42번가에서 이스트 110번가까지 10 킬로미터를 눈을 맞으며 걸어 왔습니다.
조용한 버스가 눈이 얕게 깔린 길 위를 달려갑니다.
맨해튼의 어느 거리에 눈송이들이 흐느끼거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작은 유리종 안에 촛불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을
구석에 쌓여 있던 스웨덴제 초콜릿들과 막 찍어 낸 선명한 그림엽서들
하루 일과에 지친 금발의 소녀 입가 미소가 사실은 피곤한 자의식에 살짝 겹치고 있던 그 광경을
나는 내리는 눈송이들의 말없는 몸짓으로 읽고 있습니다.
불 꺼진 집 앞을 지날 때면 순백의 눈송이들이 호흡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센트럴파크 비현실적으로 높은 나무들이 손 벌려 눈송이들을 영접하고 있었다는 것을, 검은 빛과 흰 정적이 예리한 음향으로 화하여 내 발 밑으로 검은 그림자 안 차갑게 출렁이는 물이 거친 호흡으로 다가왔습니다.
상점들마다 쇼윈도우 안은 모두 텅 비어 있었습니다. 유리장식이 치렁치렁 매달린 빨간 드레스가 19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투박한 항아리에 담긴 장미송이들도 옛 귀부인의 뼛조각이 작은 고서(古書) 안에 접혀서 단두대를 기다리던 발라드가 모두 외롭게 겨울밤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거리는 점점 더 텅 비어 갔습니다. 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여서, 나는 겨울밤 눈송이들을 모두 읽어낼 수 있을 듯하였습니다.
반스 앤 노블스에는 세상 모든 지형도(地形圖)가 다 흘러들어와 있습니다.
지나가는 이도 없는데, 어느 노부부가 손을 호호 불며 길가에 앉아 꽃을 팔고 있었습니다. 차가운 등불이 그 화안한 중심으로 노부부를 껴안고 있었습니다. 등불의 중심을 관통하여 생각 많은 눈송이들이 지구의 표층을 덮고 있었습니다. 꽃이 더 창백해질수록 노부부는 시무룩하게 발등을 내려다보며 서로 껴안고 있었습니다. 내던진 가방 안에는 더 많은 다리 잘린 꽃송이들이 하품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의 표면은 이미 얇게 살얼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댓글목록
삼생이님의 댓글
삼생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당신은 천재 인가요? 놀랍습니다.
이 시를 누군가는 아니 대부분 부정 할 것입니다. 시의 형식에 맞지 않으니까요.
함축은 없고 행도 불분하니까요. 더군다나 짧은 소설적 작가본 형식입니다. 소설가가
상상해 둔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급히 메모를 해주는 형식입니다.
하지만 이 시의 전체를 보면 함축은 존재하며 호흡도 존재합니다.
짧으면서도정갈한 행이 나누어 진 시도 수작이 될 수 있지만 수작이 되지 못하면
그저 감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시도 전체적으로는 감상에 지나지 않지만
독자에게 이미지를 선명하게 떠올리려고 하는 수작입니다.
누군가 글을 읽고 그 작가가 내놓은 장소로 들어가 본다면
그 글을 이해 못할 지라도 일단은 성공한 작품입니다.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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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영꽃부리님의 댓글의 댓글
자운영꽃부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너무 과찬해주시네요^^
눈 오던 밤, 맨해튼거리를 걸어왔던 기억을 그 감각을 한번 재구성해보고 싶어서 써 보았습니다. 뭔가 맨해튼거리의 감각을 총체적으로 구성해 보고 싶었는데, 그러다가 보니 행을 나누는 것보다는 뭉뚱그려서 모호하고 혼합된 감각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행을 나누어서 딱딱 끊다보니 전체적으로 뭉뚱그린 감각을 주기보다는 그냥 분절적으로 이미지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기교가 따라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네요.
말씀하신 대로 그냥 이미지말고는 남는 것이 없는 시가 되었네요. 상상력이 소재를 장악하지 않으면 시가 되기 어렵나 봅니다.
책벌레정민기09님의 댓글
책벌레정민기09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문장의 표현력이 좋습니다.
최근 시집 《조선 로맨틱 코미디》
많은 관심과 사랑에 힘입어
15권 주문하여,
선착순 15분께 친필 사인본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이번 주 중에 교보문고에서 출고되며,
도착하는 대로 사인해서 등기우편으로
선물해드리려고 합니다.
※ 신청은 카톡이나 문자로[010.3346.6328]!
좋은 11월 보내세요.
자운영꽃부리님의 댓글의 댓글
자운영꽃부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늘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맨해튼 밤거리의 그 풍경이 눈에 선한데 그것을 표현으로 잡아내는 일은 참 어렵네요.
좋은 밤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