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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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운영꽃부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462회 작성일 19-11-14 12:52본문
괜시리 나목 아래 서서 낙엽이 되어 본다. 사지 아래 피가 돌지 않는다. 어떤 세포는 이미 어찌할 도리 없을 정도로 노란 빛이다.
바람의 얼굴이 까뭇까뭇하다. 나는 떠나 보내야 할 것들을 먼 간이역에서 떠나 보내고, 나머지 잎들은 철로 위에 흩는다.
철로 위에 누우면 하늘이 어떤 소리로 보일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벌거벗은 몸이 투명하여 그 안을 비행기구름이 지나가고 있는 것을 들키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낙엽은 가냘픈 소리로도 불협화음을 낸다. 낙엽은 불타오르면서도 그 죽음이 착하다. 낙엽은 차가운 땅에서 거리에 가득한 선과 악의 지형도를 훑는다. 낙엽은, 가장 황홀한 병을 앓고 있는 내 창을 화사한 통각으로 가볍게 장식할 줄 안다.
낙엽들이 거리를 걸어간다. 직립보행하는 것이 인간의 특권이라고 생각되어졌던 적 있다고, 나는 낡은 지혜의 책으로부터 삐그덕거리는 계단을 지나 색채를 끌어내는 법을 배웠던 적 있다. 그조차 한 편으로는 썩어가고 있는 낙엽이었으리라.
부토에 피를 뱉고, 이제 가을을 지나가자. 내게는 낙엽조차 남지 않을 아픔의 시간을, 모질게 캔버스 위에 형형색색 입김과 보드랍고 거칠고 느슨하고 날카로운 선묘로 옮겨놓는 것이다. 사지가 창으로 꿰뚫린 창백한 것이 찾아올 때마다, 발작을 일으켰다던 엘 그레코. 핏줄조차 파리한 것이 거리 모퉁이를 지나가면 또 다른 나목 한 그루. 죽음도 저 죽을 때가 되면 선한 빛깔로 어머니를 향해 울 줄 안다.
댓글목록
봄빛가득한님의 댓글
봄빛가득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자살한 애 밴 매춘부를, 성자를 잉태한 성모로 표현한 카르바조가 연상되네요
자운영꽃부리님의 댓글의 댓글
자운영꽃부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오늘 오후 집에 돌아오는 길에 거리에 은행나무잎이 가득 깔렸더군요. 예전에 비행기구름을 보았던 가을하늘 기억도 떠오르구요. 그 감상을 그대로 적어 보았습니다. 카르바지오의 생생함과 전율이 전혀 없는 글인 걸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