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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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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자운영꽃부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59회 작성일 19-11-20 17:56

본문


잠들러 간다




이제 잠들러 가야지.  

포도나무가 내게 속삭인다. 

그러면 밤공기가 웬지 축축하고 무덥고 

부패한 복숭아향기가 섞인 것 같다. 


이럴 때면 널찍한 잎 위에 뒤척이고 있는 고향을 찾아가, 

넘싯거리는 물살 위로 그녀를 배웅한다. 작은 인사. 

그녀는 무표정한 포도알이 

내부로부터 살아나듯 바다로 떠나간다. 

퍼렇게 부푼 등짝이 시린 물 위에 떠오른다. 안녕.

포도나무 잎 신경은 저 먼 바다로 뻗어 있어, 나는 그녀의 황홀을 지상에서 가장 먼 섬까지 볼 수 있다. 


하늘로 빈 병을 던진다. 

등대로 다가간다. 

키리바시.

어느 시인이 젊은 몸을 이끌고 여기 와서 스스로 조장(鳥葬)을 당했다. 

바위 위에 난파한 시계의 녹슨 껍질을 줍는다. 바위조차 뜨거운 파도를 품고 잠들어 있다. 

너는 한번이라도 사랑을 받아본 적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잎 하나 없이 어둠을 향해 뽀죡하게 솟아 있는 후박나무 가지에 경배하라.


포도나무 넝쿨이 어둠 속으로 잠들러간다. 

나는 내 집이 없어서, 등불 깜박거리는 천장이 우주로 열려 있구나. 

별이 반짝이는 금속성의 가루가 되어 부슬부슬 흘리어진다. 

목젖 안으로 따갑고 매운 것이 흘러들어온다. 그때 울어야 할 때 너는 울지 않았어. 

누군가 잎 안으로 소곤거린다. 

꾸짖듯 저렇게 거대한 계절들. 

봄. 여름. 가을. 겨울.

내 바깥에서 나를 들여다보며 지금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  

그 또한 없는 집 안으로 잠들러 간다. 

한밤중에 조용히 벌어지는 잎 깊은 속에서 시즙이 고인다. 


어둠 속에서 새 한 마리를 듣는다. 새 한 마리 안에서 시가 숙성되어 간다. 

아프지 말자고, 그러자면 잠 못 드는 저 새의 뜨거운 소리통 안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 

잠들러 간다. 목적 없는 아름다움과 흔들리지 않는 전율, 젊은 어머니와 젊은 아버지, 내게 익숙해진 식탁과 

마음에도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유리창과 나는, 

나는 아직 저 무섭도록 투명한 것의 눈물을 

닦아줄 줄 모른다.

포도나무 넝쿨이 내 폐 속으로 기어들어온다.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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