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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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스케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22회 작성일 20-03-25 16:05본문
카페 가서 책 좀 보고 올게요
공부하려거든 독서실이나 가라 하시던
어머니, 당신께선 항상
거 가서 한 글자라도 제대로 보겠냐 하시니
내가 알아서 할게요 입을 샐쭉거리면
저거 저거 버릇 없는 놈 이라며 핀잔을 듣고는
도망치듯 빠져나와 카페에 앉아 있다 보면 이내
수험서를 내려놓고는 - 어머니, 당신의 말씀은 틀린 게 하나 없네요
무언가에 쫓기듯,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아니면 비어있는 것을 가만히 놔두다간 잡혀가는 듯
펜을 들어 빈 노트에 문장을 끄적인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데도
아랑곳 않고 써내려간다
언젠가 집에 누워 하릴없이 돌리던 텔레비전 속
작곡가 아무개는 히트 곡을 십 분 만에 뚱땅거렸다는데
쉽게 쓰여 지는 걸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그러면서도
슬며시 쉽사리 기똥찬 대작이 만들어지길 기대 하는 건 아닌지,
양심이라는 것은 있는 건지 지식인과 히트곡 작곡가 사이에서 방황한다
무아(無我)가 이 지경인 참에 - 아무 것도 없는 놈이 이 지경인 참에
한창을 써내려가다 문득 테이블 한 켠에 널브러진 책과
커피 값 사천이백원이 찍힌 영수증을 발견하곤 이내
노트를 구겨버린다. 부끄러움과 기대도 함께
날이 뜨거운 건지, 낯이 뜨거운 건지 - 카페의 에어컨은 쉴 줄을 모른다.
얼음 소리 잘그락거리며 커피를 힘껏 빨아대고도
세 번을 더 빨아 커피 잔 바닥을 훑고 나서 고갤 들어 천장을 바라 본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온갖 금관 악기 소리와
함께 어우러진 재즈 가수의 풍성한 목소리와
침을 튀기며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번호를 딴 무용담을 늘어놓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카페의 여백을 메우는 사이
나는 빈 노트에 한 글자도 채우지 못 했다.
심지어 부끄러움도 기대도 그 어느 것도
오늘도 내 노트는 버릇처럼 비어있다.
그제서야 공부할 책을 집어 들고는 펜을 끄적인다.
곧잘 나가는 듯 싶더라니, 그러다가 외울 내용을 끄적이던 펜을 한참을 바라보고,
얼음마저 다 삼켜 비어있는 커피 잔을 바라보곤
무언가에 쫓기듯,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아니면 비어있는 것을 가만히 놔두다간 잡혀가는 듯
펜을 들어 책 귀퉁이 여백에 문장을 끄적인다.
비싼 책이라 구길 수는 없으니
뭐라도 남길 수 있다는 생각인지
제법 비싼 책이라 부모님한테 손이나 벌리는 내가 구길 용기는 없으니
요번에는 한 글자라도 남길 수 있다는 기대에서인지
스쳐가는 사람들이 보기에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건실한 청년으로 보이길 바라는 약간의 자기기만 때문인지
걸작 하나 에이 뚝딱 써버리지 뭐 라고 하는 설익은 용감함 덕분인지
아니면
비어있는 꼴을 두고 못 보는 건지
비어있는 게 꼭 누구네 신세 같아서 측은했는지 어쩐지
비어있는 곳에 무언가를 끄적인다.
어느새 이 년이나
버릇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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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 임용 수험 생활을 보내면서 느꼈던 감정을 시로 써봤어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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