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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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 안에 들어가
하늘을 바라보고 눕는다.
네 지문이 묻은 유리알들이
투명하고 알 수 없는 빛을 품은 것들이
하늘을 또르르 굴러간다.
귀 기울여보아도
아무 소리 들려오지 않는 허공이지만,
후박나무 잎 얇게 저미고 저미어
살얼음처럼 투명한
표현을 얻으면 되지 뭐.
살을 저미고 저미다가
뼈가 칼 끝에 닿으면,
그곳에서 새하얀 책장들을 넘기며
파도소리 머얼리서 들려오는
익사체의 꿈을 꾸겠어,
포스근히
봄빛에 잔디밭 초록빛이 더
진해지는 소리.
비취와 주금(朱金)을 등에 인
사슴벌레가,
느릿느릿
청록빛과 연록빛 사이를 옮겨다니는 소리.
얼굴에 닿는
후박나무 잎들 무리지어
영원과 부딪치는 조용한 마찰음을
내 얼굴 위에 쏟아붓는다.
나는 이 녹음 아래에서 수많은 시들을 썼지만,
침향(沈香) 시린 어렴풋한
영원(永遠)의 속삭임에 조응하는 것은
지금은 이름 모를
황홀한 후박나무 잎들뿐이었다.
댓글목록
봄빛가득한님의 댓글

시인님의 시를 그리며 오늘처럼 이상 야릇한 기분이 드는 건 무슨 緣由인지요.
송구하고 외람되지만 詩는 시인에게 指紋이기에, 수선화를 사랑해서 하루에 한번씩 마을로 내려오는, 제가 思慕 하는 분이 있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분의 시어가 저의 관상동맥에 늘 녹아 흐르고 있는데 오늘 올려주신 시를 그리면서 유난히 그분과 시인님이 참 많이 닮았다는 착각을 하게 되네요.
누구에게나 봄은 기쁨과 희망을 서랍 속에 간직하겠지만 저의 봄빛은 어둠 속의 절규입니다. 봄빛에 몸서리치는, 때로는 봄빛을 혐오하면서도 애타게 닮고 싶은, 저의 고백입니다.
평안하시길요. 시인님!
* 오늘 그대에게 내 마음을 대신 할 앙드레가뇽의 Chanson pour liona를 띄워 보냅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그런가요? 저는 수선화를 좋아하지 않아서. 제가 좋아하는 것은 우리 어머니께서 어릴 적 산에 혼자 올라가셨을 때 산천에 가득 깔려 있던 그 꽃이라서요. 사실 그 꽃을 필명으로 한 것은 어릴 적부터입니다.
얼마 전 영화 러브레터를 다시 보았는데, 주인공의 고등학교 때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같은 것이 저도 있었음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통영에 고래가 산다 하고 이 봄이라는 시는 영원에 손이 닿았던 그 아련한 순간을 추억하며 쓴 시입니다.
봄빛이 어둠 속 절규라니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으신가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