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나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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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3건 조회 434회 작성일 20-07-30 00:33본문
밤은 늘 새하얬다. 문을 닫아 놓아도 어느새 차가운 물결이 방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이었다.
익사체 한 구가 밀려들어오는 일도 있었다. 내 방의 전등불은 흐릿해서, 익사체가 전구 안으로 들어가 수많은 색채와 음향으로 전이되어 가는 일도 있었다.
그날 밤은 침대에 누워 천장 바깥 검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에 둥둥 떠있던 익사체 한 구가 날 바라본다. 아무리 해도 시가 쓰여지지 않는 밤이었다.
흰나리꽃 바스라지는 깊은 인후 안에 보랏빛 손톱이 모두 빠졌다. 모호한 황홀이 익사체의 뺨을 길게 가르고 이어져, 하얀 이가 드러난 입술 크게 벌려진 검붉은 혀에 닿아 있었다.
"넌 나와 닮았어." 익사체는 입술을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속삭였다. "마치 쌍생아처럼." 내가 들어앉은 투명한 것 안에는, 언어라는 것이 없었다.
익사체의 얼굴은 새하얀 화석처럼 무표정했다. 그는 뜨겁기도 했다.
그는 빈 풍선처럼 공허한 내 안에 시취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그는 수면에 떠 있었다. 아무리 해도 우주를 향해 올라갈 수 없고, 아무리 해도 내가 있는 이 수심까지 내려올 수 없는. 그 유리판처럼 얇은 경계가 그를 이루고 있었다.
멀리서 사슴이 우는 생황 소리가 들려왔다.
"초여름에 피어나 절정을 향해 질주하다가 절정에 닿기 직전에 시들어버린다." 익사체가 멀리 떠내려가 버리자, 나는 이 싯구가 떠올랐다.
"절정을 향해 질주하다가 절정에 닿기 직전 팔다리부터 떨어져버린다." "모가지가 떨어져버린다." 전등불이 깨어난 듯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눈을 떠보니, 어둔 방은 그저 고요했다. 달빛 비치는 책상 위에 물 묻은 흰나리꽃 하나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댓글목록
날건달님의 댓글
날건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시원하게 사정을 하고도 돌아누워 담배를 꼬나무는 행위는 만족감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갈망일까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의 숨은 뒷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심적 상황에 따라서 대상이나 관점이 달리 보일 수도.. 누군가는 그런것을 양면성이라고 말하기도 하든데요. 이 시를 감상하고 혼자만의 생각이오니 괘념치 마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렇게 보실 수도 있겠네요.
이렇게 해석되겠구나 하는 그런 요소는 일부러 배제해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익사체와의 긴 대화같은 것을 집어넣고 싶었는데, 설득력이 없더군요. 그래서 압축을 했습니다. 익사체와의 대화는 다른 시로 써볼 생각입니다. 그 시에서는 날건달님이 말씀하신 것들이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 시는 원래 언젠가 정원에 가서 꽃을 보았을 때 떠오른 다음 시를 발전시킨 것입니다. 위의 시는 직접적인 감정을 적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아래 시는 당시 느꼈던 감상을 그대로 적고 있습니다.
새하얀 밤이었습니다. 나는 새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담장 따라
걸어갔습니다. 담장은 가다 허물어진 곳이 있었고
외계어로 쓰여진 낙서가 군데군데 있었습니다.
나는 이국의 정원에
서 있었습니다. 장미꽃 한 송이를 보고 있었습니다.
내 모국에서 온 장미는, 그러나,
다른 장미들로부터 떨어져 피어 있었습니다.
내가 그 선홍빛 살결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장미가 내게 말했습니다.
"너는 나와 닮았어."
"너는 나와 닮았어. 마치 쌍생아처럼."
내가 장미를 바라본다 생각했지만
사실은 장미가 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장미의 목소리는 여전히 선홍빛이었지만
어쩐지 쉰 듯도 들렸습니다.
"여름은 짧아. 나는 초여름에 태어나 절정 속에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지."
"그리고 늦봄에 죽어버리는 거야."
"늦봄에 다시 와줘요. 이 부엽토 위 여기저기에 흩어진 내 뼈를 주우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