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이 있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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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520회 작성일 20-08-07 00:48본문
레몬이 있는 방
- 레몬은 호흡하는 보석이다 (이영희, 1967)
이 방 안에 나와 레몬뿐입니다. 창틀에 앉은 먼지라든가 작은 마호가니 탁자라든가
연륜이 보이는 전등갓같은 것이 우리 중간에 있지만,
레몬과 난 서로를 조응합니다.
난 애벌레 흘러가는 물에 조용히 세수합니다. 돌아와보니,
레몬향기 외의 것들은 모두 씻겨가버렸습니다.
나는, 해바라기 밭이 껍질에 비치는 레몬을
투명한 글라스 안에 놓았습니다. 내 자신이 레몬 껍질 안에 갇혀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라현에서 보았던 하얀 사슴이,
주홍빛 거대한 나무기둥들 사이로 슬쩍슬쩍 보이던 사슴이
레몬 껍질 안에 갇혀 있습니다.
내 얼굴도 팔다리도 마음도 그 사슴과 함께
모두 시디 신 과육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흘러가는 레몬 껍질 위에
내 사랑 이야기를 씁니다. 멀리로
떠나갔던 적 있습니다. 안 돌아올 생각으로.
비췻빛 바다가 멀리 물러나는
조용한 바다에서 자잘하게 부서지는 비늘들을 보았습니다. 그것들은
더 큰 빛을 이루며 함께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부서진 폐선 드러난 늑골이
육지로부터 머지 않은 톱 위에 걸려있었습니다. 그대도 해변가 바위 위에 엎드려누워
앙상한 뼈를 갈매기들에게 내주고 있었습니다. 그대,
행복하셨나요? 나는 다섯 바다를 울며
떠다녔더랬습니다.
나는 그 무수히 간절한 것들이,
내게 속삭이는 파선한 것들이, 레몬 껍질
안에서 잠들지 못하는 것을 압니다. 노란 껍질 속에
격렬하게 껍질을 안으로부터 두들기는
방 하나 있습니다. 레몬과 난 이 방 안에서 서로 바라봅니다. 이 방 안에서 나는
염증으로 가득찬 폐를 쥐어뜯으며
빨갛게 무너져내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레몬 껍질은 안으로부터 더
단단하고, 완전한 球를
이루며 노랗게 견고한 감촉과 향기의 결합, 하나로
요약할 수 없는 환희와 황홀이 겹치는 자리, 대리석 탁자 위에 저렇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레몬 껍질 안으로부터 향기로운 것들이
밖으로 뛰쳐나가고자 껍질을 힘껏
두들기고 있을 겁니다. 그 간절한 것들을 가두고 있는 저 껍질은,
걷잡을 수 없는 힘을 향기롭고 조용한 것으로
변화시키고 있기에 늘 긴장이 흐릅니다.
늘 위태롭습니다. 저렇게 서늘한 레몬 껍질은 그래서
격렬합니다. 나는 무너져내리길 그만두고
내 손톱 빛깔같은 레몬 껍질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레몬 앞에 앉아
사슴 한 마리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조용한 뿔이
내 가슴을 건듭니다. 사슴은 익사하려고
빙하 녹은 물이 콸콸 쏟아지는
비췻빛 호수로 다가갔다고 합니다.
레몬 즙이 침묵의 가장 낮은 곳으로 고여들며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침묵을
조곤조곤 내게 들려줍니다. 이 방에 레몬과 나
둘뿐입니다.
댓글목록
빛날그날님의 댓글
빛날그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레몬의 피부는 차다, 로 끝나는 그이의 레몬이 있는 방 안, 을 초대했네요.
암튼 서술이 힘차고 수려합니다. 덕분에 한참 미소를 지어봅니다. 굿!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영희 수필가의 레몬이 있는 방을 읽고 그 이미지를 갖고 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오늘 이렇게 쓰게 되네요.
그 수필에서 가져온 것은 이미지뿐이고 실상은 제 이야기를 하게 되었네요.
이장희님의 댓글
이장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에서 레몬향이 풍겨져 쏟아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항상 정성이 담긴 시를 올려주심 감사드려요.
좋은 빛깔의 시 한편 잘 감상하고 갑니다.
늘 건필하소서,코렐리 시인님.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시에 제가 생각하는 빛깔이 담겨졌으면 참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