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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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치다
언젠가 산정호수에 가서 보았던 달빛.
오늘 밤하늘에 걸린 달빛은 무엇이 다를까 생각하다가
내 가슴 속 시퍼런 물결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그때 보았던 냉이꽃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거미줄이 새파랗다. 후박나무가 깨끗한 숨을 내쉰다. 나는 길게 뻗은 가지들을 헤집고
더 깊이 들어가 달빛을 찾아보기로 한다. 그 여인은 맑게 훌러가는 물 속에
여름을 남겼다. 그 여인은 물 고인 자리마다 숨막히는
황홀을 남겼다. 달빛 안에서 후두둑거리는 소리
들려온다. 빗줄기가 떡갈나무 껍질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소리 들려온다. 폐선이 나뭇가지에 걸려있다.
그대는 폐선의 삐그덕거리는 계단을 올라가 본 적 있는가? 그대는 반쯤 열린
어둠 속으로 폐선을 놓아보낸 적 있는가? 그대는 검은 뻘에 발목까지 빠지며
하구로 걸어가 본 적 있는가? 이 비 그치면
그대는 운무 피오르는 가는 잎맥과 잎맥 사이의 그 길을
어찌 호곡하려는가? 어제부터 오는 이 빗줄기들 속을
조용히 지나가는 달빛은 아무려나 흔들리지 않는
손길을 잎들 위에 던진다. 잎을 툭 건드리는 그 고통 하나 하나
마치 빗줄기처럼. 허나
빗줄기들도 보이지는 않고 소리만 들려오는 것들이 아니던가?
나는 투명한 것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본다.
나는 그대에게 가장 은밀하고 명징한
맥박이고 싶었다. 달빛 기울어지는 물가에는 항상
연보랏빛 표정이 찰랑거리듯
나는 그대를 그렇게 지나가고 싶었다. 나는 아주 작은 가지 하나도
내 무게로 인해 휘어지게하고 싶지 않았다.
댓글목록
너덜길님의 댓글

비, 바람 그치고, 시는 이렇게 아름다운데,
제가 거니는 숲길의 메타세콰이어, 벚나무,
삼나무, 그리고 이름모를 꽃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더군요.
비록 내 무게로 인해 쓰러진 것은 아니나,
언제나 현실은 시보다 시적이지요.
항상 유려하게 글을 푸시는 코렐리님,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그렇군요. 시가 무작정 비현실적인 것도 좋은 것은 아닐 듯합니다. 그것은 누가 봐도 수긍할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저는 현실적 비극을 잘 모릅니다. 그리고 잘 모르는 것은 쓸 자신이 없습니다.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요.
개인적 비극, 초현실적 비극의 테두리 안에 머물 수밖에 없네요. 개인적 비극 -> 초현실적 비극 -> 극복으로 가는 것은
제 생존방식과 관련된 것이라 저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피플멘66님의 댓글

은밀하고 명징한 시를
오랜만에 접하게 되네요
시인님
늘 건강 하시기를요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감사합니다.
늘 좋게 읽어주시는 피플멘66시인님 같은 분이 계셔서 힘이 납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분이세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
붉은선님의 댓글

끝 대목에서 명징하게 드러나는 삶의 철학이 느껴집니다 시인님의 ~~~
실타래를 푸는 듯 합니다 좋은시 잘 감상 했습니다
편안한 하루 되셨기를 .......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삶의 철학이라기보다 그냥 갈구하는 것이겠죠. 요즘 born of fire 라는 이슬람영화를 보았는데
어떻게 저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냥 감탄만 하게 되더군요.
붉은선님 시야말로 향기가 감도는 훌륭한 시였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