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그리고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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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그리고 겨울
나날의 자전이 풀어낸 시간으로 내가 닦은 것들,
맑게 증류 시키고서야 닦을 수 있어
펄펄 끓는 슬픔은 증류기처럼 목을 길게 빼고
자주 냉수를 들이키는 것이다.
달이 둥근 품속에서 긴 발톱을 꺼내는 밤이면
피를 보지 않고는 잘 닦지 않는 마음을 닦기 위해
가슴을 벌리고 큰 大자로 누워 두 눈을 꼭 감았다.
어려서 학문을 제대로 닦지 않아 어두워진 눈에서
안약처럼 짜넣은 별빛이 흘러 내리기도 했다.
닦아도 닦아도 심을 드러내지 않는 업을 둘둘 감고
화장실 벽처럼 단단한 한계에 몸을 부딪히며
먹고 사는 더러움에 한 칸 한 칸 목숨을 내주었다
태양의 분비물을 닦은 낙엽들이 쌓인 반구를 비우려고
텅빈 겨울을 향해 행성이 기울어가는 계절,
이제 내 생에 남은 눈길은 몇 리인가?
살짝 기운 달을 종자눈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줄줄줄 눈길 위로 풀어보는 생각의 두루마리 끝에
칭칭칭 속죄처럼 얇은 눈을 감고, 또 감고
가슴 뚱뚱한 눈사람 한 명 우뚝 서 있어도 좋으리,
닦고 또 닦아서
딱 한 칸만 남은 휴지가 되어
온 몸을 중력의 밑바닥에 가라 앉혔던 돌처럼
무겁던 뼈를 버리는 날,
아무 닦을 것도 없이 하얗게, 하얗게, 날아가도
참, 좋으리.
[이 게시물은 시세상운영자님에 의해 2017-10-18 08:49:37 시로 여는 세상에서 복사 됨]
댓글목록
이종원님의 댓글

닦는다는 것!!!
그 한줄만으로도 지나온 삶의 기록을 돌아보게 합니다.
큰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작은 것들에 대한, 그저 스쳐 지나간, 놓치고 피하고 닦지 못했던 것들에 대하여
마음에서의 정리 몇줄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절 또한 힘을 보태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덕수님의 댓글

고맙습니다. 이 종원 선생님! 제가 박카스 중독이 있는데
아침에 그것 한 병 먹으면 괜히 기운 나는데
이 댓글이 박카스 같습니다. 감사해요. 정말요.
정석촌님의 댓글

백골 그 하얀빛에
질경이 뿌리캐던 가마귀
거저 거저 날아 갑니다
천상 시인이십니다
공덕수님 주초 포식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석촌
최정신님의 댓글

사유와 서술이 두루 어울려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술술 풀려 독자의 감성을 자극합니다
내 생에 남은 눈길은 몇 리일까? 잴 수 없는 길을 향해...생각이 깊어집니다
공덕수님의 댓글

두 분 답글 늦어 죄송 합니다. 바빠서요.
저의 시를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칭찬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