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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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외줄을 긋고 간다
염색단지 이상한 냄새가 끼친다
한때 바다였던 개활지가 까무룩 잠들어 있다
칼금을 지우듯 바퀴 자국 흐리며 사내가
갯고랑에 닿는다
예리한 불이 건너간 달의 흰 뼈가 덜컹 부려진다
사내가 조각난 그믐을
물가에 풀어놓고 페달을 밟는다
삐거덕삐거덕 체인 감기는 소리가 난다
비명은 따라오지 않는다
사랑했다는 새하얀 말은 따라오지 않는다
가로수는 나 몰라라 흔들린다
낮게 깔린 먼지들이 풀썩인다
자전거 바퀴살에 새벽이 으깨진다
썩은 꽃잎처럼
녹슨 도관을 흐르는 개숫물처럼
멀리서 아침이 오고 있다
댓글목록
활연님의 댓글

목련이 죽는 밤
허연
피 묻은 목도리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날을 떠올리다 흰머리 몇 개 자라났고
숙취는 더 힘겨워졌습니다. 덜컥 봄이 왔고 목련이
피었습니다.
그대가 검은 물속에 잠겼는지, 지층으로 걸어 들어
갔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꿈으로도 알 수가 없습
니다. 그래도 기억은 어디서든 터을 잡고 살겠지요.
아시는지요. 늦은 밤 쓸쓸한 밥상을 차렸을 불빛
들이 꺼져갈 때 당신을 저주했었습니다. 하지만 오
늘 밤 목련이 목숨처럼 떨어져나갈 때 당신을 그리
워합니다.
목련이 떨어진 만큼 추억은 죽어가겠지요. 내 저
주는 이번 봄에도 목련으로 죽어갔습니다. 피냄새가
풍기는 봄밤.
`
활연님의 댓글

짐승들이 젖어 있다
허연
지금 이 역의 짐승들은 모두 젖어 있다.
우산을 반 바퀴쯤 돌리거나 바닥을 탁탁 치면서
소심한 저항을 하지만 공격적이지는 않다.
이 늦은 밤
여기서 만난 소심한 짐승들에게 하루를 묻는 건
예의가 아니다.
발정기가 끝나가는
태양력의 어느 날
지하철역에서 짐승들이 젖어 있다.
젖은 짐승들은 두려운 게 많고
두려운 게 많은 짐승일수록
말이 없다
젖은 자는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한다.
모든 걸 독으로 저장해놓은 짐승들.
지금 이 역에는
위험한 짐승들이 젖어 있다.
`
활연님의 댓글

말미잘
허연
말미잘이 엄마를 삼켰다
말미잘이 엄마를 뱉어냈다
.
.
.
.
엄마가 바람이 났다
엄마는
오 톤 미만 목선의 깃발처럼 펄럭였다
폐선에 올라가 바다를 보면
하늘과 바다는
나뉘어 있지 않았고
펄럭이던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도시에서 배달되어 온 필통에선
귀가 큰 아기코끼리가 웃고 있었다
소년은
무성생식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날 밤
붉디붉은 월식이 있었다
`
문정완님의 댓글

위 본문 시 어떤 비극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
잠도 안자고 시를 쏘는 활은 그래서 弓인가 봐. ㅎ
아래 위 활 시 잘 감상했습니다.
아래 위 댓글시도.
허연이라는 분, 처음 뵙는 분인데.. 시가 내공이 생사현관을 예전에 타동한 것 같습니다.
좋은 시인을 보면 확 자판을 엎고 싶어요 ㅎ
즐잠하삼^^ 활.
채송화님의 댓글

음! 자전거가 그런 것이네요. 상상력을 자극하는 면에서는 단연 으뜸입니다.
음악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활,님 쏘스보기하면 글 맨 아래에 <em->
요 대목을 활,님 밥통에서 밥 푸듯 퍼 왔으므로 우리는 밥으로도 형제!
활연님의 댓글

사건을 차용했지만, '긴장감'을 쓴 것이지요.
뭘까, 뭘까, 읽다가~~ 암것도 아니네, 그런 식.
우리가 사는 세상은 멀쩡한 것 같아도, 섬뜩하기도 하지요.
두 분, 유쾌한 오후 지으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