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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 된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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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이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1,086회 작성일 16-02-01 14:46

본문

죽 된 박

-  쪽박 -

 

이포

 

 

양지바른 곳에 박이 박박 달렸다

그건 그의 박이 아니다

그의 박은 더 깊은 골짜기 아무도 모를 곳에

평평하고 손에 닿을 듯, 한없이 멀고 온화한

그에게만 존재할 지 모를 그런 박이다

 

가끔 혼자 짓는 야릇한 웃음만 봐도

그 박을 알 수가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는 양지에 쭈그리고 앉아

땅바닥에 박을 그려보곤 했다

 

그가 박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영문을 몰라 박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박의 바깥은 몇 번이고 무지갯빛을 발하였다

 

여름에 시작한 집짓기로 싸리 움막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계곡엔 첫서리가 내렸다

아직 여물지 못한 푸른 박들은 죽이 되어 무너져 내렸다

구멍 뚫린 그의 박도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계곡엔 반영이 옥빛으로 흐르는

무른 도원에 처자식을 거느린 그는 신선이었다

식솔들의 웃음은 새소리와 어우러져

천상의 음향이 되었는데

똬리 진 그 행복은 서리 한 번에 죽 되어

무너내리고 있었다

 

천지의 조화를 몰랐던 그에게 그것은

부인이 바가지를 박박 긁어도 덤덤할 수밖에 없는

죽을 먹어도 태연할 수밖에 없는

생의 척박한 박 수확인

질기도록 맨손 쿨렁한 고행의 시작이었다

 

 

* 저 서리 맞은 철새들

[이 게시물은 시마을동인님에 의해 2016-02-05 15:18:26 창작시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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