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동짓날 어스름 녘 회문산 기슭. 쌓인 눈이 칼 바람에 소용돌이쳐 흩날리는 비탈진 산길을 타고 몇 날을 굶주린 빨치산 K가 가까스로 민가에까지 기어왔다. 탈진 상태였다. 인적 끊긴지 오래인 폐가. 아무리 둘러봐도 먹을 것은 없었다. 일순 점점 감겨가는 K의 두 눈에 저 쪽 마당 귀 한 켠에 두 구의 민간인 사체가 들어온 것은 홀연한 축복이었다. 눈 덥힌 한 사체를 들추자 반쯤 벌어진 입 사이로 비어져 나온 하얀 밥알 몇 개가 보였다. K는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두 엄지 손가락으로 시체의 입을 벌렸다. 죽은 자의 목구멍 깊숙이 오른 손 엄지와 검지가 들어 갔다. K는 입 속에서 파낸 씹다 만 얼음 밥을 허겁지겁 산 입에 쑤셔 넣었다. 식도를 핥으며 내려간 밥은 순식간에 붉은 피가 되어 K의 온 몸 구석구석으로 뜨겁게 흘러 들었다.
[이 게시물은 시마을동인님에 의해 2016-01-12 18:50:13 창작시에서 복사 됨]댓글목록
김영선님의 댓글

그렇지요,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도 저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엄동설한에 빨치산 소탕대들에게 쫓기던 빨치산들이 와중에도
죽은 동료들의 입속에 남아있는 생쌀을 파먹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요
참, 두고 두고 그 처절한 모습이 떠오르곤 했는데요,
윤희승시인님의 시를 읽으니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김태운.님의 댓글

소설 한 권을 이 시 한 편으로 다 핥았습니다
허겁지겁할 틈새 없이
가시 돋친 입안이 퍽 시리군요
잘감했습니다
활연님의 댓글

이 시 굉장하다, 처절하다. 끝까지 밀어붙여서 그 절정을 맛보았다.
윤희승님의 댓글

다녀가신 귀한 걸음들 고맙습니다 늘 평안하소서
미소..님의 댓글

생존에 대한 참 처절한 의지로 봐야겠네요
전시에서 저런 상황이 되면 인간은 모두 저렇게 되는 걸까요
자본주의 경제 전선에서도 또한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리얼한 시 감상하고 갑니다, ^^*
늘 행복하시고 일년 내내 좋은 일만 있으시기 바랍니다, ^^*
윤희승님의 댓글의 댓글

지난 송년회 때 안뵈서 서운했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무의(無疑)님의 댓글

감상하고 물러납니다.
좋다 앞에
僭恣를 붙이는데 인색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1951년, 눈 덥힌 한 사체를 들추자 밥을 먹다가 총격에 사살된 것으로 보이는 사체의 /는
호흡이 다른 것이겠지요.
윤희승님의 댓글

뱀다리야 숱하지만 지적하신 두 족은 자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사님.
오영록님의 댓글

흠흠~~ 시가 참 좋네요.. 이렇게 잘 쓰시는 분도 계셨네요..//흠~~
윤희승님의 댓글

오선생님.
새 해 인사 올립니다 복된 한 해 되시고요 올해도 좋은 글 많이 내려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