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그리고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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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공덕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5건 조회 1,328회 작성일 17-10-15 23:17본문
가을, 그리고 겨울
나날의 자전이 풀어낸 시간으로 내가 닦은 것들,
맑게 증류 시키고서야 닦을 수 있어
펄펄 끓는 슬픔은 증류기처럼 목을 길게 빼고
자주 냉수를 들이키는 것이다.
달이 둥근 품속에서 긴 발톱을 꺼내는 밤이면
피를 보지 않고는 잘 닦지 않는 마음을 닦기 위해
가슴을 벌리고 큰 大자로 누워 두 눈을 꼭 감았다.
어려서 학문을 제대로 닦지 않아 어두워진 눈에서
안약처럼 짜넣은 별빛이 흘러 내리기도 했다.
닦아도 닦아도 심을 드러내지 않는 업을 둘둘 감고
화장실 벽처럼 단단한 한계에 몸을 부딪히며
먹고 사는 더러움에 한 칸 한 칸 목숨을 내주었다
태양의 분비물을 닦은 낙엽들이 쌓인 반구를 비우려고
텅빈 겨울을 향해 행성이 기울어가는 계절,
이제 내 생에 남은 눈길은 몇 리인가?
살짝 기운 달을 종자눈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줄줄줄 눈길 위로 풀어보는 생각의 두루마리 끝에
칭칭칭 속죄처럼 얇은 눈을 감고, 또 감고
가슴 뚱뚱한 눈사람 한 명 우뚝 서 있어도 좋으리,
닦고 또 닦아서
딱 한 칸만 남은 휴지가 되어
온 몸을 중력의 밑바닥에 가라 앉혔던 돌처럼
무겁던 뼈를 버리는 날,
아무 닦을 것도 없이 하얗게, 하얗게, 날아가도
참, 좋으리.
[이 게시물은 시세상운영자님에 의해 2017-10-18 08:49:37 시로 여는 세상에서 복사 됨]
댓글목록
이종원님의 댓글
이종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닦는다는 것!!!
그 한줄만으로도 지나온 삶의 기록을 돌아보게 합니다.
큰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작은 것들에 대한, 그저 스쳐 지나간, 놓치고 피하고 닦지 못했던 것들에 대하여
마음에서의 정리 몇줄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절 또한 힘을 보태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덕수님의 댓글
공덕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고맙습니다. 이 종원 선생님! 제가 박카스 중독이 있는데
아침에 그것 한 병 먹으면 괜히 기운 나는데
이 댓글이 박카스 같습니다. 감사해요. 정말요.
정석촌님의 댓글
정석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백골 그 하얀빛에
질경이 뿌리캐던 가마귀
거저 거저 날아 갑니다
천상 시인이십니다
공덕수님 주초 포식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석촌
최정신님의 댓글
최정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사유와 서술이 두루 어울려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술술 풀려 독자의 감성을 자극합니다
내 생에 남은 눈길은 몇 리일까? 잴 수 없는 길을 향해...생각이 깊어집니다
공덕수님의 댓글
공덕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두 분 답글 늦어 죄송 합니다. 바빠서요.
저의 시를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칭찬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