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달리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형식2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02회 작성일 18-06-14 00:37본문
짝달리기
떠들썩한 체육시간 내내, 운동장 한 모퉁이에 우리 두 그림자는 분필마냥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 교실 한구석에 소화기처럼 괜히 나만 붉어져서 말야
손의 속살이 서로 포개어지는 일은 사랑하는 사람과만 가능하다던 나의 어설픈 신념과 그냥 손만 잡는 것 뿐이라던, 어딘가 흐릿하게 떨리던 너의 음색, 우리들의 비브라토 그 사이에 서 계시던 선생님 눈에 너와 난 그저 두 개의 작은 비석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애써 던지면 줄곧 빗나가고 마는
난 왜이리도 싫었을까, 작은 네 얼굴엔 유독 커서 맹하게만 보이던 무테 안경과 짧은 반바지 밑으로 뻗어나온 국기계양대 같은, 창백하고 긴 두 다리가
끝내 선생님은 며칠 째 여린 목밑에 둘러오시던 감빛 마후라를 끌러 내리시더니, 멍든 허공만이 가득 찬 우리 두 손 사이에 쥐어 주시며 이러면 너희 둘이 결혼할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나는 너랑 결혼하지 않을 텐데, 정말 그럴 텐데, 왜 크게 아니라고만 외치고 싶었을까
손금마저 구겨지도록 세게 마후라를 움켜쥐고 우린 출발선에 들어선 것인데, 다 이겨버리고만 싶었는데, 정말 이겨버리고 싶었는데 트랙을 반쯤 달려서 였을까, 맥없이 처지는 너의 얕은 호흡과 안경알 너머 비뚤어진 초점이 걸려서 계속 내 발목에 걸려서, 멍하니 서서 결승선을 향해 내딛는 그림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거야
시간이 마비된 것처럼, 우리가 꼴찌라는 사실은 무뎠는데 손의 감촉은 생생했어 정말 생생했는데 마후라, 젠장 그 마후라는 어디로 날았는지 종일 운동장을 뒤적여도 보이지 않았어 어찌나 꼭꼭 숨었던지 머리칼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던 거야
[이 게시물은 창작시운영자님에 의해 2018-06-17 17:49:01 창작의 향기에서 복사 됨]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