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떠러지를 붙잡고 있는 조그만 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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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낮하공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5건 조회 749회 작성일 18-09-09 01:23본문
낭떠러지를 붙잡고 있는 조그만 손들
낮하공
비가 온다
축축한 면 하나가 생긴다
그곳에만 글자가 써지는 파란색 매직펜이 있다
난 코뚜레가 달린 종족이야
창문이 어둠을 읽는다 겨울엔 여기에 투명한 종기들이 맺히지 방의 입장에서 보면 그건 불치병이야
비는 아래에서 위를 한번 쳐다볼 때 새어나오는 어둠이다 어둠은 스며들어 오늘과 내일을 꼼꼼하게 적신다
우산은 인간이 지닌 또 하나의 다리다 늦은 퇴근길 이런! 녹슨 사다리가 외진 골목을 걸어가고 있어
검은가장과노란엄마의푸른아이들과,
푸른아이들의노란엄마와 검은가장의검은아내와,
검은가장과노란엄마의푸른아이들의 푸른아이들의노란엄마와검은가장의검은아내의 그러니까새카맣게탄가장을 태우고
어둠을 견딜 우산도 없이
어둠이 때도 모르고 세차게 내려서
오래 우려먹은 허연 달이 등을 바라보고 있다
가장의 등보다 무거운 우표를 본 적 있니? 희미해지는 노동의 척추를 앞면에 붙이고 가는 저
흠뻑 젖은 편지 봉투,
철벅철벅 어디론가 발송되고 있어
갑자기 멈출 때, 크게 커브를 돌 때, 느닷없이 출발할 때,
새벽을 넘어뜨리지 않는 건
달랑 버스 손잡이 하나 뿐인
난 사다리가 비룡으로 변하는 마술을 끝끝내 믿다가도
내 방이 파래질수록
창문의 종기들이 더욱 커지는
마법, 아니 공포에 시달리곤 해
우린 서로 모르지만 한 장의 사진 안에 들어 있다
서로의 방에서 칼집에 꽂힌 다리를 서로에게 나누어준다
울고 싶은 기분으로 웃으며 괴상하게 생긴 파란색 매직펜을 흔든다
가을은 잎 진 자리마다 서늘한 어조로 첨삭을 한다
그래서 겨울나무는 어두워도 파란색이다
난 가장 큰 물방울로 마법사를 죽일 거야
댓글목록
서피랑님의 댓글
서피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재밌습니다, 사물의 모습이 새롭게 바뀌는 군요,
겨울나무는 어두워도 파란색이다.
파란 입술로 떨고 있다면, 그를 안아주고 싶네요,
낮하공님의 댓글의 댓글
낮하공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AI가 시를 쓴다면 한 번에 완성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화자가 대상을 포용하지 못해서 한 연을 더 채워넣었어요.
생경하실 수 있겠는데 후하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낮하공님의 댓글
낮하공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무허가
송경동
용산4가 철거민 참사현장
점거해 들어온 빈집 구석에서 시를 쓴다
생각해보니 작년엔 가리봉동 기륭전자 앞
노상 컨테이너에서 무단으로 살았다
구로역 CC카메라 탑을 점거하고
광장에서 불법텐트생활을 하기도 했다
국회의사당을
두 번이나 점거해
퇴거불응으로 끌려나오기도 했다
전엔 대추리 빈집을 털어 살기도 했지
허가받을 수 없는 인생
그런 내 삶처럼
내 시도 영영
무허가였으면 좋겠다
누구나 들어와 살 수 있는
이 세상 전체가
무허가였으면 좋겠다
동피랑님의 댓글
동피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구석으로 몰린 먼지 하나까지 눈뜨게 해서 가을을 준비하셨네요.
낮하공님 아니시면 누가 온기를 찬 바닥에 먼저 불어넣을꼬?
수고했습니다.
낮하공님의 댓글의 댓글
낮하공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낙엽과 눈이 이불 만드는 과정을 방해만 하지 않더라도
나무가 얼어 죽는 일은 없을 텐데요.
훼방꾼들의 힘이 너무나 공고해서 그늘지지 않은 곳이 없군요.
눈 밝은 사람들 속만 타들어 가지요.
이불처럼 오셨어요.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