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방의 중심에서 /중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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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방의 중심에서
그날 저녁,
집 안의 모든 문이 닫혀 있었다.
문 손잡이는 차가웠고,
문틈 사이로 바람도 들지 않았다.
밖은 아직 환했지만,
내 안은 그보다 먼저 저물어 있었다.
나는 말없이
식어가는 국을 떠먹었다.
숟가락 끝은
작은 파동도 일으키지 않았고,
국물 위로
시간이 식은 얼굴처럼
표면만 부유하고 있었다.
말하려다 멈춘 말이
입술에 닿기 직전,
나는 그 말을 삼켰고
말의 껍질만
목구멍 어딘가에 걸렸다.
안쪽 방에는
한 번도 울리지 않은 시계가 있었고,
그 시계는
늘 흐르면서도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다.
나는 그 방을 향해
아무 이유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누가 날 부른 것도 아니었고,
그곳에 누가 있었던 적도 없었지만
나는 그곳에
무언가가 남아 있다고
믿고 있었다.
무슨 기억이었더냐.
무슨 사랑이
그토록 오래 남아 있었더냐.
말해지지 못한 감정들은
서랍도 아니고
사진도 아니고,
그저 벽에 기대어
그림자처럼 웅크려 있었다.
창밖에서는
이따금
바람이 무언가를 스치듯 지나갔지만,
아무것도 흔들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불 꺼진 방의
중심에 앉았다.
무언가를 기다린 것도,
무언가를 보내는 것도 아닌 자리였다.
불도 없고
소리도 없고
빛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그저,
존재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침묵보다 더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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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09님의 댓글

"나는 그 방을 향해
아무 이유 없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