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학 강의 네번째[시조의 형성과 전개] - 2 -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2) 조선 전기 조선 초의 절의가는 단종의 퇴위(退位)에 관련된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이 그들의 절개를 읊은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 등이 지은 절의가와 함께,
15세기의 시조작품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한가롭고 평화스러운 경치를 읊은 서경시(敍景詩)이다.
새로이 건국된 조선왕조가 비교적 안정되고 모든 기구가 정제됨에 따라
사대부들의 여유 있는 생활이 시조의 주된 소재를 이루었고,
시조는 그들의 정신적 자세를 표현하는 그릇이 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 江湖四時歌〉는
사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와 그 속에서 생활하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같이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근원은 어디까지나
군주의 은혜로써 비롯되었다는 뜻을 담은 종장이 반복되는 연시조로서,
그 뒤 수없이 쏟아져 나온 서경시의 한 전형이 되었다.
언뜻 보아 자연시(自然詩)처럼 보이는 이들 작품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도
유교적인 충의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자연을 감상하면서도 유교적인 충의를 노래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가하고도 평화로운 서경시가 오늘날 전하고 있는
고시조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15세기로부터 수립된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 왕조를 건국하던 당시의 공로로
권위를 유지해 오던 구세력에게 과감하게 도전해오는 신흥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 신흥세력의 역량이 축적되자 드디어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지배하는
이른바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당쟁으로 말미암은 유학도 사이의 심리적 갈등은
이 시조시형을 통해서도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신흠(申欽)·이항복(李恒福) 등의 작품에 드러나고 있는 당쟁에 대한
경계나 당쟁으로 인하여 희생된 인재들에 대한 애석함 등이 그 예가 된다.
마음이라는 추상적 실체를 구상화하여 자신의 이성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심리적 갈등을 객관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등장하는 것도
이시기의 당쟁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자기수행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인
인간으로서의 자성(自省)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도 이러한 당쟁의 와중에서 산출된 것들이다.
이런 유형의 작품으로는 서경덕(徐敬德)·권호문(權好文)·김구(金絿)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당쟁에 패배하고 먼 곳에서 귀양살이를 할망정
이들 유학자들이 지니고 있는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다.
체념과 허무 속에서 오히려 자기를 잃지 않고 낙관적인 관조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려는 유학 도들의 긍정적인 태도를 지탱시켜준 것이
곧 그들의 충성심이었던 것이다.
비록 역사의 추이에 따라 소재는 변할지라도 군주에 대한 충의라는 주제만은
변하지 않았던 주제의 정착성, 이것이 유학도의 서정시로서 시조문학이 갖는 특징적인 성격이다.
또한 시조문학이 지닌 역사적인 기능이기도 했다.
조선 전기의 시조가 지니고 있던 이러한 특징은 16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세 갈래의 지향점이 발견되어 그 세 방향에서 각기 우수한 작품을 산출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 陶山十二曲〉과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 高山九曲歌〉 등으로 대표된다.
이들 작품에서는, 자연에 대하여 정치적 이념과 태도를 선행시키고 있는
조선 전기 유학자들이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품격과 자연에 투영된
인생관의 한 극치를 시조에 반영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는 정철(鄭澈)의 〈훈민가 訓民歌〉로 대표되는 작품들이다.
〈훈민가〉와 같은 시조에서는 유교적인 윤리관을 주제로 한다.
백성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쓰인 것이므로 토속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결국 시조가 토속적인 언어기교를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황진이(黃眞伊)로 대표되는 기녀(妓女)들의 작품들이다.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애정을 시조시형을 통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유학자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시조의 작자로 등장하게 된 기녀들의 작품은
전대의 고려가요가 지녔던 발랄한 애정표현을 시조시형을 통하여 재창조하였다.
또한 시조문학 내지는 조선시대의 모든 측면에서 억제되고 있었던
여심(女心)의 표현을 활발하게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시조문학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
관념적인 유교이념을 형상화하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구상적인 인간성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있어서도
모자람이 없는 이원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