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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 (3) 1920년~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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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草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392회 작성일 20-04-11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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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   (3)

현대시조   (3)


(2) 최남선의 시조 최남선이 처음 발표한 시조는 〈국풍 4수〉이다. 이 작품은 첫 수만 단시조이고, 나머지 세 수는 장시조 형태이다. 종래의 기사형식은 바꾸었으나 그 서술내용으로 보아 고시조나 다름없는 작품이다. 

그 뒤에도 ≪대한유학생회보≫·≪대한매일신보≫·≪소년≫·≪청춘≫ 등에 계속하여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국풍 4수〉를 비롯한 그의 초기시조는 개화의식을 나타내고 있어서 개화기시조라고 부른다.

그의 시조에 대한 관심은 1909년 자신이 발행한 ≪소년≫에 ‘옛사람은 이런 시를 끼쳤소’라는 상설란에 고시조를 소개함으로써 나타난 바 있다. 최남선은 ≪소년≫에 〈국풍 4수〉를 비롯하여 14제 40여수와 ≪청춘≫지에 10제 30수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소년≫에서 최남선은 시조를 국풍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시조를 중국 ≪시경≫의 국풍에 해당하는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가요로 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때에 국풍 아닌 새 제목도 볼 수 있다. 〈삼면환해국 三面環海國〉·〈봄마지〉·〈태백(太白)에〉·〈청천강〉 등이다. 여기에 와서 〈국풍 4수〉나 신문의 개화기시조보다 더욱 분명하게 시조의 형식을 6구의 형식으로 분절해놓은 점에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국풍 4수〉는 말할 것도 없고 ≪소년≫·≪청춘≫지의 시조는 한결같이 개인적 리듬에서 나온 새로운 의미내용은 아니다. 그의 시정신의 본질인 ‘조선심(朝鮮心)’을 기존의 관습적 리듬에 맞추어 노래한 것에 불과하다.

최남선의 본격적인 시조 창작활동은 1926년에 발표한 ≪백팔번뇌≫에서 시작된다. ≪백팔번뇌≫는 현대 최초의 개인창작 시조집이다. 그 서문에서 시조를 ‘문자의 유희가 아니라, 엄숙한 사상의 한 용기’로 보고 있다. 또한 시조를 우리 시가의 본류로 보면서 시조 부흥의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최남선의 시조는 문학적 의미보다 그 사회적 기능을 중요시하는 교술문학적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이 무렵에 발표된 이광수의 시조, 특히 명승지를 읊은 기행시조는 개인적 정서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최남선의 시조에 비하면 분명히 새로운 세계이다.

(3) 1920·1930년대의 근대적 변화 시조의 근대적 변화가 관념보다 구체, 집단보다 개인의 발견과 표현이라고 할 때, 근대적 감수성의 시조가 본격적으로 쓰여진 것은 이광수·주요한(朱耀翰)·변영로(卞榮魯)·정인보(鄭寅普)·조운(曺雲)·이은상(李殷相)·이병기(李秉岐) 등의 활동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개화기시조가 등장한 것은 1910년 전후이겠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현대시조가 논의되고 쓰여진 것은 1920년대 이후의 일이다. 특히 1926년 이른바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대항하여 국민문학운동이 전개될 때 조선주의의 부흥과 더불어 본격적인 시조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근대 최초의 개인시조집인 최남선의 ≪백팔번뇌≫가 발간되었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시조에 관한 논문과 작품이 많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는 서구적 충격 속에서 전통적인 것과 단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서구적인 것을 무시하기도 불가능한 문화적 갈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민감했던 시기이다. 그리하여 일본을 통하여 이식된 자유시가 시단을 휩쓸던 상황 속에서도 시조가 전통적 시형식으로 자각되고 시조의 가치가 역설된 것은 맹목적인 서구화에 대한 반작용, 곧 자기상실이라는 위기감의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즉 전통적 질서에 복귀함으로써 한국시가 자기를 찾고 자기의 원모습을 발견하려는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 시조라는 전통적 시형식을 처음으로 들고 나왔던 이는 최남선이었다. 1926년 ≪조선문단≫ 5월호에 발표한 〈조선국민문학으로의 시조〉라는 논문이 그 본격적인 움직임이었다.

최남선은 시조가 절대 최선의 문학양식은 아니더라도 조선국토·조선인·조선심·조선어·조선음률을 통하여 모든 조선적 요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시조를 조선이라는 체로 걸러진 정수라고 규정하고, 민족문학으로서 가장 알맞은 전통양식이 시조임을 강조하였다.

이어 손진태(孫晉泰)는 1926년 ≪신민 新民≫ 7월호에 〈시(詩)와 시조에 표현된 조선사람〉에서 시조의 명칭·기원·형식 등을 간단히 말하고는 시조에서 본 우리 나라 사람의 생활과 사상성에 대하여 말하였다.

염상섭(廉想涉)은 〈시조에 관하여〉(조선일보, 1926.12.)에서 “시조마저 빼버리면 조선문학은 무엇이 남을 것인가, 편협한 국수적 견해를 벗어나 널리 인생을 위한 예술로서 시조를 가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민≫에서는 〈시조는 부흥할 것인가〉(1927.3.)라는 설문을 가지고 이병기 외 11인이 다양한 의견을 들어 발표한 바 있다. 이 설문에 대한 답변 가운데 이은상은 고시조는 그대로가 우리 민족문학의 체계에 대한 광탑(光塔:등대)이 되는 것이니, 이를 연구하여 이 형식에다 새로운 사상과 감정을 담아 새로운 시조를 창작하여 시로서 지향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이병기는 〈시조를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1.)라는 논문을 통하여 현대시조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다음의 여섯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실감실정(實感實情)을 표현하자는 것이며, 둘째는 취재의 범위를 확장하자는 것이다.

셋째는 용어의 수삼(數三:선택), 넷째는 격조의 변화를 들었고, 다섯째는 연작을 쓰자는 것이었으며, 마지막 여섯째로는 쓰는 법, 읽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최초로 현대시조 창작에 대한 이론을 제시한 것인데 현대시의 방법과도 상응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또 하나 이 시기에 있어서 시조론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안확의 ≪시조시학 時調詩學≫(1940)이다.

(4) 8·15 이후의 시조 민족사의 거시적 단위로 보아 해방 후 50년은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다.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그때 그 광복의 감격과 기대가 반세기에 이르는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조금씩 퇴색하거나 망각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해방은 민족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남북 분단이라는 대결 관계에 놓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구속해 온 것도 명백하다.

빼앗긴 국권, 그러나 국권을 찾았을 때 강대국의 대결의 장으로 분할된 국가와 더불어 사상과 이념이 나누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8·15는 해방과 광복의 의미를 지니면서 동시에 분단과 대결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이러한 양면성은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낳았고 좌우의 대립은 민족문학의 분열을 낳았으며, 심지어는 남과 북의 서로 이질적인 문학을 낳게 하였다.

시조라고 예외는 아니다. 시조를 보는 시각이 남과 북이 매우 다르다. 한 쪽에서는 시조가 민족적이고 전통적인 형식이라면서 무조건 계승되어야 한다고 했다.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시조를 양반 사대부의 생활 감정과 미학적 요구를 반영한 노래로 보고 무조건 부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중요한 것은 관심을 시각에서 실상으로 돌려 북에서는 시조에 대한 획일적인 시각을 버리고 시조의 실상을 깨우치게 하는 일이다. 동시에 남에서는 다시 한번 시조의 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다져야 한다.

해방 직후는 창작의 성과보다 이념의 대립, 정치적인 갈등이 고조되었던 비시적(非詩的) 시대다. 해방의 감격에 압도되어 대부분의 시가 정치적 전언 일변도였다.

양주동(梁柱東)의 〈님을 뵈옵고〉, 정인보의 〈십이애 十二哀〉, 이병기의 〈해방전-살풍경〉, 박노제의 〈해방〉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시편들이 당시 시의 정치적 전언이 있을 법한 판에 박힌 상투성과 무관한 것은 시조의 절제된 형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조운의 ≪조운시조집 曺雲時調集≫(1947), 정인보의 ≪담원시조집 饋園時調集≫(1948), 이병기의 ≪가람시조집 嘉藍時調集≫(중판, 1947), 양상경(梁相卿)의 ≪출범≫(1946), 정훈(丁薰)의 ≪머들령≫(1949), 이희승(李熙昇)의 ≪박꽃≫(1947) 등의 출간은 해방 직후 시조계를 대표하는 시사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물론 이들 시조는 대부분 해방 후가 아니라 해방 이전의 암흑기에 씌어져서 발표되지 못하고 있다가 출판된 것들이다.

이렇듯 해방전의 암흑기와 6·25전쟁까지의 공백기를 메꾸고 1950년대로 이어주는 과도기적 교량적 역할을 담당한 시인들은 이병기·이은상·조운·이호우(李鎬雨)·김상옥(金相沃)·김어수(金魚水)·이영도(李永道)·장하보 등이다. 그 중에서도 조운은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이들은 주로 ≪백민≫·≪죽순≫·≪영문 嶺文≫·≪민성≫ 등을 통하여 작품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현대시조에 있어서 1950년대는 주목할 만한 시기다. 1950년에 터진 6·25전쟁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정규전으로서 단순한 남과 북의 군사적 충돌이 아니었다. 대전 이후 국내 정치 구조의 필연적인 양극화와 더불어 시작된 동서 양 진영의 냉전이 실제의 무력 전쟁으로 벌어진 최초의 전쟁이다.

안으로는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분단 체제를 한층 강화시키는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만큼 6·25의 충격은 해방 후 한국시의 양상을 바꾸는 데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으며 시조의 현대적 성격을 특징 짓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에 와서 시조는 현실시처럼 서정적 자아가 외향하기도 하고 전통시처럼 내향하기도 한다. 서정적 자아의 외향은 전쟁의 극한상황을 직접 다룬 이은상의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1958)·〈고지가 바로 저긴데〉(1956), 최성연(崔聖淵)의 〈핏자국〉(1955) 등의 시편에서 볼 수 있다. 서정적 자아의 내향은 박재삼(朴在森)·정소파(鄭韶坡)·장순하(張諄河)·최승범(崔勝範)·송선영(宋船影) 등처럼 전통적 서정을 노래하는 시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전통적 사상력을 통한 이러한 자기회복의 움직임은 1950년대가 거둔 시적 성취다. 그리고 이것은 전후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과 1930년대의 시문학파와 앞 세대의 가람·노산 등의 시조가 계기가 되어 이루어진 문화적 각성과 자연감각이 내면화된 것이다. 그렇다고 은둔·안주 등 조선조 시조 이래 오랜 내력을 지닌 귀거래사의 자연은 아니다. 그만큼 자연감각으로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2) 최남선의 시조 최남선이 처음 발표한 시조는 〈국풍 4수〉이다. 이 작품은 첫 수만 단시조이고, 나머지 세 수는 장시조 형태이다. 종래의 기사형식은 바꾸었으나 그 서술내용으로 보아 고시조나 다름없는 작품이다. 

그 뒤에도 ≪대한유학생회보≫·≪대한매일신보≫·≪소년≫·≪청춘≫ 등에 계속하여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국풍 4수〉를 비롯한 그의 초기시조는 개화의식을 나타내고 있어서 개화기시조라고 부른다.

그의 시조에 대한 관심은 1909년 자신이 발행한 ≪소년≫에 ‘옛사람은 이런 시를 끼쳤소’라는 상설란에 고시조를 소개함으로써 나타난 바 있다. 최남선은 ≪소년≫에 〈국풍 4수〉를 비롯하여 14제 40여수와 ≪청춘≫지에 10제 30수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소년≫에서 최남선은 시조를 국풍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시조를 중국 ≪시경≫의 국풍에 해당하는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가요로 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때에 국풍 아닌 새 제목도 볼 수 있다. 〈삼면환해국 三面環海國〉·〈봄마지〉·〈태백(太白)에〉·〈청천강〉 등이다. 여기에 와서 〈국풍 4수〉나 신문의 개화기시조보다 더욱 분명하게 시조의 형식을 6구의 형식으로 분절해놓은 점에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국풍 4수〉는 말할 것도 없고 ≪소년≫·≪청춘≫지의 시조는 한결같이 개인적 리듬에서 나온 새로운 의미내용은 아니다. 그의 시정신의 본질인 ‘조선심(朝鮮心)’을 기존의 관습적 리듬에 맞추어 노래한 것에 불과하다.

최남선의 본격적인 시조 창작활동은 1926년에 발표한 ≪백팔번뇌≫에서 시작된다. ≪백팔번뇌≫는 현대 최초의 개인창작 시조집이다. 그 서문에서 시조를 ‘문자의 유희가 아니라, 엄숙한 사상의 한 용기’로 보고 있다. 또한 시조를 우리 시가의 본류로 보면서 시조 부흥의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최남선의 시조는 문학적 의미보다 그 사회적 기능을 중요시하는 교술문학적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이 무렵에 발표된 이광수의 시조, 특히 명승지를 읊은 기행시조는 개인적 정서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최남선의 시조에 비하면 분명히 새로운 세계이다.

(3) 1920·1930년대의 근대적 변화 시조의 근대적 변화가 관념보다 구체, 집단보다 개인의 발견과 표현이라고 할 때, 근대적 감수성의 시조가 본격적으로 쓰여진 것은 이광수·주요한(朱耀翰)·변영로(卞榮魯)·정인보(鄭寅普)·조운(曺雲)·이은상(李殷相)·이병기(李秉岐) 등의 활동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개화기시조가 등장한 것은 1910년 전후이겠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현대시조가 논의되고 쓰여진 것은 1920년대 이후의 일이다. 특히 1926년 이른바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대항하여 국민문학운동이 전개될 때 조선주의의 부흥과 더불어 본격적인 시조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근대 최초의 개인시조집인 최남선의 ≪백팔번뇌≫가 발간되었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시조에 관한 논문과 작품이 많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는 서구적 충격 속에서 전통적인 것과 단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서구적인 것을 무시하기도 불가능한 문화적 갈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민감했던 시기이다. 그리하여 일본을 통하여 이식된 자유시가 시단을 휩쓸던 상황 속에서도 시조가 전통적 시형식으로 자각되고 시조의 가치가 역설된 것은 맹목적인 서구화에 대한 반작용, 곧 자기상실이라는 위기감의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즉 전통적 질서에 복귀함으로써 한국시가 자기를 찾고 자기의 원모습을 발견하려는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 시조라는 전통적 시형식을 처음으로 들고 나왔던 이는 최남선이었다. 1926년 ≪조선문단≫ 5월호에 발표한 〈조선국민문학으로의 시조〉라는 논문이 그 본격적인 움직임이었다.

최남선은 시조가 절대 최선의 문학양식은 아니더라도 조선국토·조선인·조선심·조선어·조선음률을 통하여 모든 조선적 요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시조를 조선이라는 체로 걸러진 정수라고 규정하고, 민족문학으로서 가장 알맞은 전통양식이 시조임을 강조하였다.

이어 손진태(孫晉泰)는 1926년 ≪신민 新民≫ 7월호에 〈시(詩)와 시조에 표현된 조선사람〉에서 시조의 명칭·기원·형식 등을 간단히 말하고는 시조에서 본 우리 나라 사람의 생활과 사상성에 대하여 말하였다.

염상섭(廉想涉)은 〈시조에 관하여〉(조선일보, 1926.12.)에서 “시조마저 빼버리면 조선문학은 무엇이 남을 것인가, 편협한 국수적 견해를 벗어나 널리 인생을 위한 예술로서 시조를 가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민≫에서는 〈시조는 부흥할 것인가〉(1927.3.)라는 설문을 가지고 이병기 외 11인이 다양한 의견을 들어 발표한 바 있다. 이 설문에 대한 답변 가운데 이은상은 고시조는 그대로가 우리 민족문학의 체계에 대한 광탑(光塔:등대)이 되는 것이니, 이를 연구하여 이 형식에다 새로운 사상과 감정을 담아 새로운 시조를 창작하여 시로서 지향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이병기는 〈시조를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1.)라는 논문을 통하여 현대시조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다음의 여섯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실감실정(實感實情)을 표현하자는 것이며, 둘째는 취재의 범위를 확장하자는 것이다.

셋째는 용어의 수삼(數三:선택), 넷째는 격조의 변화를 들었고, 다섯째는 연작을 쓰자는 것이었으며, 마지막 여섯째로는 쓰는 법, 읽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최초로 현대시조 창작에 대한 이론을 제시한 것인데 현대시의 방법과도 상응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또 하나 이 시기에 있어서 시조론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안확의 ≪시조시학 時調詩學≫(1940)이다.

(4) 8·15 이후의 시조 민족사의 거시적 단위로 보아 해방 후 50년은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다.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그때 그 광복의 감격과 기대가 반세기에 이르는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조금씩 퇴색하거나 망각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해방은 민족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남북 분단이라는 대결 관계에 놓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구속해 온 것도 명백하다.

빼앗긴 국권, 그러나 국권을 찾았을 때 강대국의 대결의 장으로 분할된 국가와 더불어 사상과 이념이 나누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8·15는 해방과 광복의 의미를 지니면서 동시에 분단과 대결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이러한 양면성은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낳았고 좌우의 대립은 민족문학의 분열을 낳았으며, 심지어는 남과 북의 서로 이질적인 문학을 낳게 하였다.

시조라고 예외는 아니다. 시조를 보는 시각이 남과 북이 매우 다르다. 한 쪽에서는 시조가 민족적이고 전통적인 형식이라면서 무조건 계승되어야 한다고 했다.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시조를 양반 사대부의 생활 감정과 미학적 요구를 반영한 노래로 보고 무조건 부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중요한 것은 관심을 시각에서 실상으로 돌려 북에서는 시조에 대한 획일적인 시각을 버리고 시조의 실상을 깨우치게 하는 일이다. 동시에 남에서는 다시 한번 시조의 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다져야 한다.

해방 직후는 창작의 성과보다 이념의 대립, 정치적인 갈등이 고조되었던 비시적(非詩的) 시대다. 해방의 감격에 압도되어 대부분의 시가 정치적 전언 일변도였다.

양주동(梁柱東)의 〈님을 뵈옵고〉, 정인보의 〈십이애 十二哀〉, 이병기의 〈해방전-살풍경〉, 박노제의 〈해방〉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시편들이 당시 시의 정치적 전언이 있을 법한 판에 박힌 상투성과 무관한 것은 시조의 절제된 형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조운의 ≪조운시조집 曺雲時調集≫(1947), 정인보의 ≪담원시조집 饋園時調集≫(1948), 이병기의 ≪가람시조집 嘉藍時調集≫(중판, 1947), 양상경(梁相卿)의 ≪출범≫(1946), 정훈(丁薰)의 ≪머들령≫(1949), 이희승(李熙昇)의 ≪박꽃≫(1947) 등의 출간은 해방 직후 시조계를 대표하는 시사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물론 이들 시조는 대부분 해방 후가 아니라 해방 이전의 암흑기에 씌어져서 발표되지 못하고 있다가 출판된 것들이다.

이렇듯 해방전의 암흑기와 6·25전쟁까지의 공백기를 메꾸고 1950년대로 이어주는 과도기적 교량적 역할을 담당한 시인들은 이병기·이은상·조운·이호우(李鎬雨)·김상옥(金相沃)·김어수(金魚水)·이영도(李永道)·장하보 등이다. 그 중에서도 조운은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이들은 주로 ≪백민≫·≪죽순≫·≪영문 嶺文≫·≪민성≫ 등을 통하여 작품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현대시조에 있어서 1950년대는 주목할 만한 시기다. 1950년에 터진 6·25전쟁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정규전으로서 단순한 남과 북의 군사적 충돌이 아니었다. 대전 이후 국내 정치 구조의 필연적인 양극화와 더불어 시작된 동서 양 진영의 냉전이 실제의 무력 전쟁으로 벌어진 최초의 전쟁이다.

안으로는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분단 체제를 한층 강화시키는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만큼 6·25의 충격은 해방 후 한국시의 양상을 바꾸는 데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으며 시조의 현대적 성격을 특징 짓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에 와서 시조는 현실시처럼 서정적 자아가 외향하기도 하고 전통시처럼 내향하기도 한다. 서정적 자아의 외향은 전쟁의 극한상황을 직접 다룬 이은상의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1958)·〈고지가 바로 저긴데〉(1956), 최성연(崔聖淵)의 〈핏자국〉(1955) 등의 시편에서 볼 수 있다. 서정적 자아의 내향은 박재삼(朴在森)·정소파(鄭韶坡)·장순하(張諄河)·최승범(崔勝範)·송선영(宋船影) 등처럼 전통적 서정을 노래하는 시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전통적 사상력을 통한 이러한 자기회복의 움직임은 1950년대가 거둔 시적 성취다. 그리고 이것은 전후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과 1930년대의 시문학파와 앞 세대의 가람·노산 등의 시조가 계기가 되어 이루어진 문화적 각성과 자연감각이 내면화된 것이다. 그렇다고 은둔·안주 등 조선조 시조 이래 오랜 내력을 지닌 귀거래사의 자연은 아니다. 그만큼 자연감각으로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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鴻光님의 댓글

profile_image 鴻光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현대적 시조의 흐름에 감사합니다.

한국인
얼이 녹아
핏줄이 이어지고

변천의
흐름에도
본성은 변함 없고

지구촌
방방곡곡에
영원토록 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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