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조) // 해동모텔을 지나며 / 선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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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의(無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1,974회 작성일 15-07-14 05:29본문
해동모텔을 지나며
홀딱 반한 길이 많다. 꽃이 많다. 말하던 중
봄 들판 한가운데 느닷없는 모텔이라니
추웠던, 아니 얼었던 세월아 자고 갈래?
자잘한 꽃단추가 많이 달린 블라우스
잘 채워진 단추들만 풀다가도 늙겠구나
지퍼의 질주본능의, 지름길을 모른 채
얼음의, 침묵의, 금기의 단정함으로
나는 나의 울음소리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상처의 불안을 안고 손이 손을 잡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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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無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선안영 시인의 작품도 답답함을 극복한 장인의 활달함이 좋다. 3수의 작품이 곧장 읽힌다. 첫 수 초장부터 마디를 끊어가는 힘이 자유롭다. 한 문장으로 맺지 않았지만 분명 초장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아, 들판 가운데 모텔이라니? 이 느닷없는 등장에 “얼었던 세월아 자고 갈래?” 하며 꼬드기는 재기가 만만찮다. 봄은 결코 지름길로 오지 않는다. 몇 번의 꽃샘추위를 견뎌야 비로소 꽃을 터뜨린다. 개화 이전 자잘한 꽃망울들은 스타트라인에서 튀어 나갈 순간만을 기다리지만 출발의 총성은 멀었다. 이제저제하다가 늙는다는 말이 실감 난다. 셋째 수에서는 ‘의’ 반복을 통해 봄 직전의 불안정한 심사를 나타낸다.
은근 재미있다. 시조의 3장 6구에 얽매이지 않은 탓이다. 장과 구, 마디와 마디를 불러내어 풀어헤칠 것인가, 그 정해진 율격에 갇힐 것인가. 누구도 후자가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답답한 시조는 쏟아져 나올까? 언어를 다루는 솜씨의 자유자재함이 부족한데도 문단에 이름을 걸기 때문이다. 독자로 있든지 치열한 연마의 과정을 거치든지 해야 하는데 겁 없이 강호에 나와 칼을 휘두르기 때문이다. 현대는 친절한 시대다. 둥글둥글 적 없이 살아야 편안하다. 그래서인지 질책보다는 격려, 바른말보다는 상찬에 익숙하다. 질책하면 가벼운 사람이 되고 치켜세우면 예의 바른 사람이 된다. 읽히지 않은 시집에도 미문의 해설이 붙고, 그 해설대로라면 대가 아닌 시인이 없다.
이달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