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 / 천숙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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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산 둘러 병풍치고
논 밭 두렁 거닐면서
고향집 앞마당에
남은 가을 풀고 싶다
속 엣 것 다 비워놓고
달빛 당겨 앉히고 싶어
설핏 지는 해 걸음
고향집에 등불 걸고
밭고랑을 매면서
새벽별도 만나고 싶다
콩나물 북어국 끓여
시린 속도 달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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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사관님의 댓글

시조집 『비움』, P.16.-<등불>
문무학 시인. 문학평론가님의 해설중에서-
비우는 삶을 지향하는 시인 천숙녀는 왜 비우고 싶어 할까? 이런 의문은 매우 아둔한 질문 같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일 수 있다. 이 시조집에서 그 단서를 잡아낼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예를 들면 이 시조집 자서에 시조 한 편을 올려놓았는데 그 종장을 “비움에/ 평온한 지금/ 잔잔한 물무늬다.”로 매듭짓고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천숙녀의 비움은 ‘평온’을 위해서라는 방증 하나를 잡는다.
그러면 또 우리는 평온(平穩)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평온’은‘조용하고 평안함’를 가리키는 말이다.‘조용하다’는 그것이 환경이라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한 것이지만, 사람에 견주면 말이나 행동 성격 따위가 수선스럽지 않고 매우 얌전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 말의 사회적 의미를 만들어 보면 사건과 사고, 말썽까지도 없다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독도사관님의 댓글

시인이 꿈꾸는 그 평온한 환경은 어떤 것일까? ‘등불’이란 작품이 그곳을 가르쳐준다. 평온이란 낱말이 갖는 뜻과 같이 ‘산 둘러 병풍치고/ 논 밭 두렁 거닐면서// 고향집 앞마당에/ 남은 가을 풀고 싶다// 속 엣 것 다 비워놓고/ 달빛 당겨 앉히고 싶’은 매우 조용한 곳이다. 이 작품의 고요는 논두렁 밭두렁에서, 고향집 앞마당으로 달빛을 당겨오는 고요다. 수사적으로 점층적 기법을 써서 평온의 깊은 맛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아주 고요한 환경 속에서 시인은 등불을 걸고 싶다. 등불을 걸고 밤새워 일을 하고 새벽엔 북어 국을 끓여서 속을 덥히는 그런 삶을 꿈꾸고, 그런 삶을 이루고 싶어서, 비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비움을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을까. 그 탐구의 흔적이 이 시조집일 수도 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비움이 또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런 것도 아니다. 어렵긴 하지만 열두 번도 더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