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을 향한 망설임
밤기차는 지상의 좌표 위에 놓인 선로를 바늘처럼 꿰어나가면서 시간의 미미한 행적을 남기고 있었다. 나란 존재는 위도와 경도의 어느 지점에 자리해 있는가? 나의 운동과 지향은 이 장소와 환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실존의 자각을 위한 첫걸음이다.
이로써 “어디인가 여·기·는”이란 질문이 유효하다. 김보람의 〈태피스트리〉는 ‘나’와 ‘그’ 간의 이항대립을 통해 존재론적 질문을 제기한다.
이 시조가 가진 단점 중의 하나인 각주는 다음과 같다. “태피스트리는 실로 짜인 회화를 일컫는 말로 씨실(Weft)과 날실(Warp)로 이루어진 색실로 한 올 한 올 직조한 것으로 감각과 기술이 어우러진 섬유 예술작품이다.” 포스트모던 작가이자 사상가인 보르헤스의 작품에는 수많은 각주가 달려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삼장(三章)’이라는 형식적 특성이 강조되는 ‘시조’ 장르의 작시 면에서는, 각주를 시의 외연에 내세우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자유시와 시조의 차별성이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조의 정형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삼장’ 내에서 의미적 완결을 이루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이 시조에 붙여진 각주는 없어도 될 사족에 해당한다. ‘태피스트리’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이 시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인데, 좀 더 과감하게 말하면 ‘태피스트리’는 하나의 단어이기 때문에 독자의 교양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예를 들자면, 임채성의 《세렝게티를 꿈꾸며》라는 제목의 시조집이 있다. ‘세렝게티’가 지명인 줄 안 것은 조금 지나서였다. 그전에는 이 시조를 읽을 시간도 없었다. 이 시조를 꼼꼼히 읽으면 당연히 지명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다음은 독자의 몫이다. 무능한 독자에게 ‘태피스트리’의 뜻을 자세히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다시 언급하거니와 ‘삼장’은 시조의 내재적 형식률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안에서 다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조의 정형률이 완결될 수 없다.
〈태피스트리〉의 리듬감은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풀려 있으나, ‘나’와 ‘그’ 간의 대응을 병렬시킴으로써 반복률의 효과를 거둔다. 이 시조의 의미 전개는 첫째 수에서 ‘나’와 ‘그’ 간의 대립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하여 둘째 수의 심화 단계를 거쳐 다시 셋째 수의 대립과 자기점검으로 완결된다.
대립적인 ‘나’와 ‘그’는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다. 상호 대응하는 두 개체가 “뒤엉킨 혼돈 속”에서 “행렬”을 수행함으로써 회화적 무늬를 직조하는 등의 창조적인 생산을 이룬다. 대립을 통한 통합의 과정이 사랑과 생성의 과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발랄한 사유가 이 시조를 의미론적으로 한 차원 끌어 올린다. 첫째 수의 ‘뜨거움’과 ‘차가움’의 대립도 사실은 양성적 합일을 위한 준비 과정에 해당한다.
둘째 수에서는 이와 같은 대립이 충족을 위한 고유한 역할임을 나타내면서 합일점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실존의 좌표가 바로 “옛집들의 주소”이자 “몸속의 길”이다. 물질적 장소가 주체의 몸 안에 흘러들어오는 형국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현존은 늘 한계 상황에 처하게 마련이다. “맨몸으로 홀로 선다/ 배 밑을 간지럽히는 파도 한 길씩 솟고”에서 보듯 화자의 갈망은 아직 충족되지 않는 상태이다.
마무리에서는 현존의 지점으로 다시 돌아와 완결되는데, ‘나’와 ‘그’ 간의 대립과 역할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적 장치로 드러난다. “나는 여기 있고 또 거기 있을 수 있”으므로, 열/냉, 상향/하향, 웃고 우는 것, 먹고 싸는 것 간의 대립이 하나의 좌표 설정을 위한 도구적 장치일 뿐이라는 다소 위악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태피스트리’처럼 도구적으로 역할 부여된 현대인의 삶이나 사랑에 대하여 화자는, “또 한 번 두리번거린다, 어디인가 여·기·는”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젊은 시인이기 때문에 이처럼 실존에 대한 망설임과 회의는 당연히 다가올 수 있는 것이며, 정말 내가 위치한 곳이 어디인가 두리번거리며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염창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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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페이지 - 김보람
너무 낯설어 나를 닮은 당신들 소리치는 후렴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어
오늘도 수고했어요, 새파란 날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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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 - 김보람
우리 안에 갇힌 외로운 짐승처럼
입술을 쫑긋거리며 아귀굴을 벌린다
갑갑한 터널 벽들을 몸속에 품은 내가
지하 감옥 깊은 곳에 한순간 포박되듯
너무도 많은 내가 거기에 잠겨있다
뱃속을 내리누르는 꾸룩대는 내장 속
들러붙는 사방을 주르르 쏟아놓는다
높이도 깊이도 없는 거꾸로 된 바닥에
오늘을 먹어치우고 어제를 내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