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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조의 형성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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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草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29회 작성일 20-01-2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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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의 형성과 전개

(1) 고시조 형성 문학·예술로서의 시조는 14세기경인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정제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전하는 시조집 중에는 고구려의 을파소(乙巴素)나 백제의 성충(成忠), 신라의 설총(薛聰) 등의 작품이라고 실려 있는 경우가 있으나 거의 인정하지 않는 것이 현 학계의 공통된 견해이다.

현재 남아 있는 시조집에서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작가들을 들어보면 고려시대의 작가로는 충숙왕 때의 우탁(禹倬)과 충혜왕 때의 이조년(李兆年), 공민왕 때의 이존오(李存吾)·길재(吉再)·원천석(元天錫)·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이 있다. 조선 초기의 작가로는 정도전(鄭道傳)·변계량(卞季良)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말 조선초의 유학자들로 주목된다. 초기의 시조작가가 당대의 쟁쟁한 성리학(性理學)의 석학들로 망라되어 있다는 사실은 곧 시조가 형성되는 데 있어서 그 내용의 형성요건을 제시하는 데에 성리학이 중대한 의의를 가졌음을 암시한다.

즉, 신라 이후로 우리 민족의 생활과 민족문화의 뒷받침이 되어온 불교가 고려 말기에 들어서서는 누적된 폐단으로 말미암아 백성과 나라를 해치는 화근으로 전락하였다. 이에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각광을 받게 된 주자학(朱子學)의 등장과 함께 시조문학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시조는 고려말 이래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떠오른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새로운 시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세련된 문화와 예술을 누리고 있었던 고려 말기에 성립된 시조시형이 그보다 앞선 시대의 문학이나 음악으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시조의 기원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여러 차례 시도된 바 있는데, 그 동안의 연구를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외래기원설이다. 이는 다시 중국의 불가곡(佛歌曲)에서 수입되었다는 설과 한시(漢詩)를 번역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으나, 이 두 설은 모두 오늘날 학계에서 부정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재래기원설이다. 이는 다시 네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신요(神謠)나 민요 또는 무당의 노랫가락이 시조의 원형이라는 설이고, 둘째는 시조의 기원을 향가에서 찾을 수 있다는 설이다. 셋째 〈정읍사 井邑詞〉와 같은 6구체가(六句體歌)가 그 기원이라는 설과 넷째 고려가요가 붕괴되어 단형화하면서 시조시형이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다.

이 중에서 앞의 세 가지 설은 너무 추상적이다. 시조시형과 가장 많이 닮은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무당의 노랫가락도 극히 후대에 발달한 곡조이기 때문에, 사실과 맞지 않아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시조의 기원은 네 번째 학설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고려가요 중에서도〈만전춘 滿殿春〉의 제2연과 제5연에서 시조의 형식과 아주 가까운 면을 찾아볼 수 있다.

耿耿孤枕上에 어느 瑯미 오리오

西窓을 여러悧니 桃花ㅣ發悧두다

桃花勘 시름업서 笑春風悧蝎다 笑春風悧蝎다

(제2연)

南山에 자리 보와 玉山을 버여 누어

錦繡山 니블안해 麝香각시를 아나 누어

藥든 가寄을 맛초督사이다 마초督사이다

(제5연)

이 작품에 나타난 리듬의 템포나 호흡의 완급, 수사의 방법 등은 시조가 지니는 풍격(風格)에 아주 가깝게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세 장으로 나뉜 것이 한 연을 이루는 형태적인 성격이 시조의 형식을 낳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우리 시가의 고유한 음보율인 3음보율을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운율형태인 4음보율의 완성과 아울러, 첩련식(疊聯式)인 고려가요의 형태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 이 새로운 형태가 독립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이로써 시조의 형식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학자들에 의하여 전대의 문학 및 음악·예술의 형태가 극복되면서 성립된 14세기의 시조문학작품들 중에는 역사적 사건과 결부된다. 그리하여 설화와 함께 전하거나 작품에 제목이 붙여진 것이 많다.

특히 이방원(李芳遠)이 조선의 건국을 앞두고 구세력을 대표하는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불렀다는 〈하여가 何如歌〉와, 이에 대답한 정몽주의 〈단심가 丹心歌〉는 유명하다.

정치적 격변기라 할 수 있는 이 시기의 작품들은 회고가(懷古歌)와 절의가(節義歌)로 나누어볼 수 있을 만큼 나라를 위한 충절이 가장 힘있는 주제로 대두되었다.

회고가는 고려의 멸망 후 지난날의 왕조를 추억하면서 옛 도읍지인 송도(松都)를 찾은 느낌을 읊은 고려 유신(遺臣)들의 작품을 말한다. 절의가는 고려의 충의지사들이 그들의 충성과 단심을 노래하고, 기울어가는 고려왕조에 대하여 개탄한 작품들이다. 이러한 절의가는 조선초에도 나타난다.

(2) 조선 전기 조선초의 절의가는 단종의 퇴위(退位)에 관련된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이 그들의 절개를 읊은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 등이 지은 절의가와 함께, 15세기의 시조작품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한가롭고 평화스러운 경치를 읊은 서경시(敍景詩)이다.

새로이 건국된 조선왕조가 비교적 안정되고 모든 기구가 정제됨에 따라 사대부들의 여유있는 생활이 시조의 주된 소재를 이루었고, 시조는 그들의 정신적 자세를 표현하는 그릇이 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 江湖四時歌〉는 사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와 그 속에서 생활하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같이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근원은 어디까지나 군주의 은혜로써 비롯되었다는 뜻을 담은 종장이 반복되는 연시조로서, 그 뒤 수없이 쏟아져나온 서경시의 한 전형이 되었다.

언뜻 보아 자연시(自然詩)처럼 보이는 이들 작품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도 유교적인 충의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자연을 감상하면서도 유교적인 충의를 노래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가하고도 평화로운 서경시가 오늘날 전하고 있는 고시조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15세기로부터 수립된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 왕조를 건국하던 당시의 공로로 권위를 유지해 오던 구세력에게 과감하게 도전해오는 신흥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 신흥세력의 역량이 축적되자 드디어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지배하는 이른바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당쟁으로 말미암은 유학도 사이의 심리적 갈등은 이 시조시형을 통해서도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신흠(申欽)·이항복(李恒福) 등의 작품에 드러나고 있는 당쟁에 대한 경계나 당쟁으로 인하여 희생된 인재들에 대한 애석함 등이 그 예가 된다.

마음이라는 추상적 실체를 구상화하여 자신의 이성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심리적 갈등을 객관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등장하는 것도 이시기의 당쟁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자기수행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인 인간으로서의 자성(自省)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도 이러한 당쟁의 와중에서 산출된 것들이다. 이런 유형의 작품으로는 서경덕(徐敬德)·권호문(權好文)·김구(金絿)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당쟁에 패배하고 먼 곳에서 귀양살이를 할망정 이들 유학자들이 지니고 있는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다. 체념과 허무 속에서 오히려 자기를 잃지 않고 낙관적인 관조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려는 유학도들의 긍정적인 태도를 지탱시켜준 것이 곧 그들의 충성심이었던 것이다.

비록 역사의 추이에 따라 소재는 변할지라도 군주에 대한 충의라는 주제만은 변하지 않았던 주제의 정착성, 이것이 유학도의 서정시로서 시조문학이 갖는 특징적인 성격이다. 또한 시조문학이 지닌 역사적인 기능이기도 했다.

조선 전기의 시조가 지니고 있던 이러한 특징은 16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세 갈래의 지향점이 발견되어 그 세 방향에서 각기 우수한 작품을 산출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 陶山十二曲〉과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 高山九曲歌〉 등으로 대표된다. 이들 작품에서는, 자연에 대하여 정치적 이념과 태도를 선행시키고 있는 조선 전기 유학자들이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품격과 자연에 투영된 인생관의 한 극치를 시조에 반영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는 정철(鄭澈)의 〈훈민가 訓民歌〉로 대표되는 작품들이다. 〈훈민가〉와 같은 시조에서는 유교적인 윤리관을 주제로 한다. 백성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므로 토속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결국 시조가 토속적인 언어기교를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황진이(黃眞伊)로 대표되는 기녀(妓女)들의 작품들이다.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애정을 시조시형을 통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유학자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시조의 작자로 등장하게 된 기녀들의 작품은 전대의 고려가요가 지녔던 발랄한 애정표현을 시조시형을 통하여 재창조하였다. 또한 시조문학 내지는 조선시대의 모든 측면에서 억제되고 있었던 여심(女心)의 표현을 활발하게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시조문학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 관념적인 유교이념을 형상화하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구상적인 인간성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있어서도 모자람이 없는 이원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3) 조선 후기 조선 후기, 특히 17세기의 시조에서도 이러한 이원적 성격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신흠(申欽)과 윤선도(尹善道)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윤선도는 시조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손꼽힌다. 그의 작품 〈어부사시사 漁夫四時詞〉는 각 계절마다 각 10수씩, 사계절에 총 40수로 된 연시조이다.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갈고 닦아 간결하면서도 품격이 돋보이는 표현이 뛰어나며, 속화된 자연을 시로써 승화시킨 대표작이다.

기교면에서의 대구법(對句法)의 처리나 자연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상(詩想)의 전개, 그 시상의 전개가 펼쳐보이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는 주목할 만하다. 그 뒤에도 많은 작가와 작품이 산출되었으나, 제재 및 주제면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때까지의 시조는 유학자들의 여기(餘技)로서 창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조는 그들의 소박한 감정을 직선적으로 표출하는 영탄적인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또한 시조는 확고한 창작의식이나 문학적 진통을 겪지 않고 수월히 불리어졌던만큼 ‘어즈버, 아희야, 두어라’와 같은 감탄사가 빈번하게 쓰였으며, 그것이 시행 종결(詩行終結)의 방법으로 즐겨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많이 사용된 표현기교는 서술적인 방법이다. 대부분의 전원시(田園詩) 또는 자연시들이 서경(敍景)을 위주로 하는 서술적인 방법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유학도들의 여기로서 창작된 시조이었다 할지라도, 때로는 천재적인 작가를 만나기도 한다. 이들에 의해 지어진 시조는 서정적인 표현이나 사실적인 표현으로 지양되고 승화되는 경우도 있으며 때로는 고도의 상징적 수법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실(寫實)이라 함은 어떠한 객관적인 사물을 재현하는 것을 뜻하며, 서정은 작자의 내면적인 세계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사실적 표현은 자연히 객관성을 띠게 되고, 서정적 표현은 자연히 주관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조의 표현기교에 있어서는 서구적인 표현방법과는 달리 이 주관성과 객관성이 합치되는 곳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시조에 있어서는 객관적 사실성이 항상 주관적 서정성에 일단 여과되어서 표현되는 데에 그 특징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실과 서정의 통합은 결과적으로 상징성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니, 시조의 표현기교는 이러한 관조(觀照)의 정신에서 그 다채로울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시사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시조의 발전과정에 큰 변화를 초래한 것이 사설시조이다. 사설시조는 17세기에 이르러 나타났으리라고 추정되나, 구체적으로 성행되었던 사실은 18세기 자료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16, 17세기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조선왕조의 정치·사회체제는 여러가지 면에서 모순과 허점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이에 유학도 자체내의 비판적 시각으로부터 도전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며 미미하나마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서민의식으로부터도 저항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도전과 저항의 집약이라고 할 수 있는 실학사상(實學思想)은 이 땅의 정신생활면에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켜 정치·경제·문화 등 각 분야에 하나의 분수령적인 구획을 긋기에 이르렀다. 문학예술부문에 이 실학사상이 가져다준 가장 큰 변화는 과거의 율문 전성시대를 극복하고 산문문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바탕을 닦아주었다는 데 있다.

사설시조는 모든 문학예술의 형식이 산문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던 이 시기의 산물이다. 시조가 지닌 3장체의 형식적 특성은 살리면서, 초장과 중장에는 그리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범위내에서이기는 하지만, 일부 비판적 유학도들은 정형률을 깨고 새로운 가치관에 의하여 사설시조를 창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설시조는 이들 일부 비판적인 유학도보다는 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하여 더욱 새롭게 발전한다. 서민들은 유학도와는 생활감정·사고체계·가치관을 달리하였기 때문에 사설시조로의 전환을 이룩하는 데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 창법(唱法)과 작법(作法)을 개발할 수 있었다. 일부 비판적인 유학도에 못지않게 날카로운 현실의식으로 시조의 전통적인 미학을 변혁하고 극복해 나갔던 것이다.

그들은 한편에서는 지배계층인 유학도의 이념과 통치방법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유학도적인 행동을 취하려 하였고, 그들의 대상으로서 지배계층을 언제나 의식함으로써 유학도에 의존하고 동화하려는 사고방식에 젖어들기 일쑤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이 뿌리를 내리고 호흡하고 있는 피지배계층의 가치관에 의하여 유학도의 그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지배계층의 의식구조에 의존하고 동조하려 할 때에는 시조의 미의식을 사설시조 속에서 그대로 연장하여 수용하였다. 그러나, 지배계층의 가치관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때는 시조의 미의식을 변혁하고 극복하였다. 때로는 지배계층의 미의식에 대응하는 서민들의 독자적인 미의식을 창조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의 지배계층인 유학도들은 그들이 구축한 사회체제의 질서와 안정이라는 두 가지 측면의 요구에 의하여 시조문학을 창조해갔다. 이에 반해 피지배계층인 서민들은 그러한 유학도들이 창출해낸 시조의 미학을 연장, 수용하거나 일부 변용을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마침내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학을 창조하였던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유학도들은 그들 사회의 질서라는 측면의 요구에 의하여 숭고미(崇高美)와 비장미(悲壯美)를 구현하고 그들 사회의 안정이라는 측면의 요구에 의하여 우아미(優雅美)를 추구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서민들은 유학도들의 이러한 미의식을 수용하는 한편 사설시조를 통하여 시조가 구현하고 있는 세 가지 미적 범주와는 또다른 미의식인 희극미(喜劇美)를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400여수의 사설시조 가운데 초현실적인 소재에 의하여 숭고미를 구현하거나 현실체념적인 주제에 의한 비장미를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혹은 현실도피적인 주제에 의한 우아미를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설시조는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소재에 의한 희극미를 창조하고 있다.

사설시조는 지난날의 영탄이나 서경의 경지를 완전히 탈피하고, 적나라한 묘사와 상징적인 암유(暗喩)로써 그 표현기교를 바꾸고 있다. 또한 애정·거래(去來)·수탈(收奪)·패륜(悖倫)·육감(肉感) 등 다채로운 주제를 다루면서 지난 시대의 충의사상에 밀착된 시조의 주제를 뒤엎고 있다.

(4) 평민가객의 출현과 가집 편찬 이와 같은 사설시조의 발달과 함께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 발달과정에 있어 가장 주동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평민가객(平民歌客)의 출현이다.

이들 평민가객들 중의 한 사람인 김수장(金壽長)이 편찬한 시조집 ≪해동가요≫에는 17, 18세기에 걸쳐 활약한 가객 56인의 명단이 실려 있다. 이들은 대개가 문벌이나 지위가 낮은 인물들이며, 사회적으로 크게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16세기 이래 시조의 창작에 참여한 기녀들과 함께 시조문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바 이들의 업적을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로, 이들은 끊임없는 연수를 통하여 시조의 작법과 창법을 전수하고 있다. 역사적인 문헌에 나타난 바로는 ≪광해군일기≫에 당시 고부군수를 지냈던 이승형(李升亨)이 ≪고금가사 古今歌詞≫라는 한 권의 책을 가지고 기녀인 은개(銀介)에게 5, 6년 동안 노래를 가르친 기록이 있다.

김수장이 소개하고 있는 가객들 가운데 가장 시대가 앞선 인물인 허정(許珽)은 이승형이 은개에게 노래를 가르쳤던 17세기 초엽에 태어나서 승지·부윤(府尹) 등의 벼슬을 지낸 사람이다. 〈광해군일기〉에 보이는 이승형에 대한 기록은 평민가객들이 활발하게 배출되기 이전에는 일부 선구적인 유학도들이 노래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들 일부 선구적인 유학도들과 그 뒤의 평민가객들 사이의 관계는 자세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18세기의 평민가객들이 시조의 창법과 작법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한 흔적은 다수 발견된다.

장안으로부터 관서지방으로 시조의 장단법을 가져갔던 이세춘(李世春)이나 영남지방에 가서 시조의 창법을 전수하였던 김유기(金裕器), 김유기의 집을 방문하여 시조를 논하였던 김천택(金天澤) 등은 모두 18세기의 가객들이다.

이외에도 18세기 가객들로는 박상건(朴尙健)에게서 창법을 익힌 김우규(金友奎)와 김성기(金聖器)에게 거문고와 퉁소를 배운 김중열(金重說)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19세기의 박효관(朴孝寬)·안민영(安玟英) 등의 활동도 18세기의 가객들이 수립한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로, 이들은 사설시조라는 새로운 시형을 발굴하고 발전시켰다. 현전하는 사설시조는 작자를 알 수 없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또 가객들이 창작한 작품도 평시조가 대부분인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18세기의 평민가객을 대표하는 김수장이 36수의 사설시조를 창작하였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당시의 문학과 음악은 이들 평민가객에 의하여 발달하였고 동시에 이들의 독자적인 미의식인 희극미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 시기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성행, 가사문학의 변화, 판소리사설의 완성 등 일련의 문학 내적·외적 변이과정과 동일한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셋째로, 이들은 가단(歌壇)을 형성하고 시조집을 편찬함으로써 시조문학의 항구적인 발전을 꾀하고 있다. 18세기 초반에 일군의 가객들과 더불어 가단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는 김천택은 주의식(朱義植)의 작품을 구해준 변문성(卞文星), 김성기의 작품을 얻어준 김중려(金重呂) 등과 협력하고 그밖의 많은 가단 구성원들의 이해와 협조를 얻어 시조집 ≪청구영언≫을 편찬하였다.

김천택이 이끄는 가단의 일원이었던 김수장은 18세기 후반에 새로이 배출된 신진가객들과 더불어 가단을 재편성하여 발전시켰으며, 이들의 협조를 얻어 시조집 ≪가곡원류≫를 편찬하였다.

이들이 편찬한 ≪청구영언≫·≪해동가요≫·≪가곡원류≫는 다른 시조집들에 비하여 수록한 작품수가 많고 그 편차체제(編次體制)가 정연하여 3대 시조집이라고 일컫고 있다.

이밖에도 송계연월옹(松桂烟月翁)의 ≪고금가곡 古今歌曲≫, 이형상(李衡祥)의 ≪병와가곡집 甁窩歌曲集≫, 편찬자 미상의 ≪화원악보≫·≪남훈태평가 南薰太平歌≫, 김교헌(金喬軒)의 ≪대동풍아 大東風雅≫ 등의 시조집들이 전한다.



다음편은 시조 - 현대적인 양상과 과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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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末世)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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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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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운 삼월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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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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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생각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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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라면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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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락눈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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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속으로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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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弔問)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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