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만나러 왔다 가는 생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 부르다가 멀어지는 것들 / 김왕노 우리는 우리의 말에 익숙할 뿐이지 별의 말에는 익숙하지 않다. 밤새 창가에 와서 어이 얼굴 한번 보자 잠깐이면 돼 하며 속삭이다 가는 별을 모른다. 그 별이 하늘을 놓치고서 아아아 별똥별이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도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바람의 말 강물의 말 물새의 말도 모른다. 미지서 오지서 다소곳이 피었다가 심심하면 놀러와 내 향기가 한창일 때 그 때 오면 더 좋고라는 풀꽃의 말, 바람에 끝없이 실려오는 그 말을 모른다. 지구 아니 우주에서 단 한 번 피었다가 영원히 지는 풀꽃의 짦은 생, 짧은 여정을 알지도 못한다. 우릴 애따게 부르다 시나브로 멀어지는 것들을 모른다. ![]() 그들이 손잡이가 없을 때 / 김왕노 손잡이가 달렸다는 것은 누구의 소유라는 표시입니다. 그 누군가의 소유가 되고 싶다는 증표이기도 합니다. 손잡이가 있는 한 그 누구에게 헌신도 하고 넘치도록 채워진 자신을 조심스레 다루는 정성도 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구름의 손잡이를 잡고 하늘을 넘어가는 바람을 보기도 합니다. 나도 내 옆구리나 몸 어디 들기 좋은 손잡이가 있어 그 누가 애지중지 다루기를 기다린 적이 있습니다. 손잡이가 없기에 들다가 놓치기도 하고 불편하다고 묵혀버린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1000 CC 나 500 CC 맥주잔에 손잡이가 없을 때 누가 그렇게 홀짝이면서 맥주잔을 다루어 주겠습니까? 태양에게 손잡이가 없다면 누가 오래 허공에 잡아두기나 하겠습니까. 그 문장에 손잡이 같은 구절이 없다면 누가 그 문장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겨 오래 음미하겠습니까? 연애는 자신의 어느 부분에 손잡이를 달고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미는 것입니다. 부부의 연을 맺는 다는 것은 평생 서로를 다루기 쉽게 손잡이를 서로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쏟아지는 빗방울에게도 손잡이가 있어 손잡이를 일일이 잡고 나뭇잎 위에서 톡톡 하도록 지상으로 인도하는 그 무엇이 있기 마련입니다. 잡기 좋은 손잡이를 가졌다는 것은 사랑의 행동반경 안에 와 있다는 증거입니다. 산다는 것은 턱하니 제 손잡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일 손잡이를 맡긴다는 것은 자신의 생을 다른 사람의 처분에 맡기는 것과 같으나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손잡이와 함께 저물어가는 것들이나 그들이 손잡이가 없을 때 한 없이 쓸쓸해져 가차 없이 슬픔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저기 잡기 좋게 손잡이가 돋아난 차들이 들판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손잡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차의 질주는 아름답고 힘찹니다. 너 만나러 왔다 가는 생 / 김왕노 나의 생이란 너 만나러왔다가는 생이라고 하자, 꽃도 별도 아니고 밤도 새벽도 아니고 전갈도 거미도 인어도 아니고 너 만나러 왔다가 가는 생이라고 하자. 너를 마주치지 못해서 네가 허무한 포말, 신기루 같아도 네 이름을 부르며 자위하는 밤이어도 다 너 만나러 왔다가 가는 일 나의 생이란 여름 소낙비도 아니고 소쩍새 울음도 물총새 울음도 아닌 너 만나러 왔다가 가는 생이라고 하자. 만나러가다가 마주치는 고목뿌리까지 뽑는 태풍, 지상의 모든 간판을 휘날릴 것 같은 태풍도 만나고 총성이 다슬기처럼 귀에 다닥다닥 붙던 5 월도 만나지만 정말 만난다는 것은 내 생을 한 보따리 짐으로 싸 너 만나러 왔다 가는 것 전생의 기억마저 말처럼 몰아 너 만나러 왔다가는 생이라 하자 허탕 쳐 뒤돌아 서 가는 것조차 다 너 만나러 왔다가는 길 목숨 수없이 갈아 신으며 온 이번 생은 너 만나러 왔다가는 생이라 하자. ![]() 길 위에서 학습 / 김왕노 나는 매일 너에게 갔지만 가지 못했다. 나는 매일 너에게 가지 않았지만 마음은 벌써 몇천 번 갔다 왔다. 가면서 가지 못하는 것이 가지 않으면서 가는 것이 가는 것이라 해야 하는지 가지 못하는 것이라 하는지 갔으면서 가지 못하는 것 가지 않으면서 가는 것 그런 모순 속으로 봄비가 내리고 별빛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수색에 매일 갔지만 수색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말 너를 사랑했지만 한 번도 사랑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 네게 가는 길 위에서 배운다. ![]()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 김왕노 한때 물방울이던 당신, 풀꽃에 맺히던 한 방울 당신, 이슬이던 당신, 부르는 작은 목소리에도 톡 터지려던 물방울 당신, 먼지만 닿아도 터지려던 당신,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눈물방울보다 더 작은 당신,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하던 당신, 내가 물방울이면 쉽게 엉겨붙어버릴 거라던 당신, 창문을 열 고 먼 하늘을 바라보며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마르면서 휘날리는 하얀 빨래를 보며 아직도 그리움을 하고 계시나요. 철거덕거리는 기차바퀴 소리가 잠을 잘게 쓸고 가면 가만히 일 어나 아직도 먼 먼 그리움을 하십니까.나를 닮은 물방울 하나 낳고 싶다던 당신, 가임을 기다리며 물방울로 반짝였던 당신, 속이 투명했던 당신, 물방울과 맺혀 있으면 찾지 못할 당신, 밤새 추적추적 비 내리면 내가 그리워 눈물방울과 운다는 당신, 당신이 정말 보고 싶었냐고 내게 물으며 자꾸 스며들던 물방울 당신, 하늘 이 편에서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는 비행운 을 보면 아직도 싱싱한 그리움을 하십니까. 기름 같은 나와는 끝내 섞이지 못한 물방울 당신, 물 같이 흘러가버린 당신, 아직도 달이 차오르면 짐승처럼 우우 울면서 끝없이 그리움을 하십니까. 벌써 내게도 온 그리움의 갱년기인데 우울의 긴 그림자를 끌고 가는 저녁, 아직도 당신은 여전히 그리움을 하십니까. ![]() < 김왕노 시집 -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중에서> |
추천0
댓글목록
물풀님의 댓글

봄꽃이 환한 계절입니다
도서관 창밖으로 보여지는 풍경이 여유로운 날이였습니다.
김왕노 시인의 시집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읽으면서
가슴 따뜻한 시간 보냈네요.
다녀가시는 분들 기침 감기가 유행입니다 건강하시고요 행복하시고요.
봄날의 따사함이 생의 곳곳에 깃드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