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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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바보 같은 아침이다.
이제 항암 치료를 마친 어머니와 새로 소주방을 차려 신경을 바짝 쓰고 있는 누나를 위로 해주기 위해
절을 가자고 했던 것이 화근이다. 나는 내가 절에 가면 그냥 절을 할 수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민가를 절로 꾸민듯한 그 절에, 하얗게 칠한 부처님들을 보니,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나는 화장실을 간다하고 그 법당 안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어머니와 시누의
눈치가 보여 절을 하는 시늉을 하리라 마음 먹었는데 속이 메스꺼워서 향냄새를 맡을 수가 없었다.
이런 유치하고 배타적인 고집을 가지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일일까? 이전엔 새벽잠도 자지 않고
백팔배를 하러 가고, 마음이 찌푸둥한 날엔 발길 닿는 절에 가서 다리가 후들거리도록 절을 쏟고 나면
기분이 나아지곤 하지 않았던가? 오늘도 주일인데 교회를 가지 않고, 여전히 그 주님보다 등 푸른
주님을 먼저 찾지 않는가? 저번에도 절에 가서 절을 하지 않는다고 어머니로부터 한 말씀 실컷 들었는데
오늘도 어머니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 있었다. 부처님은 무신론자다. 오로지 순수한 자신을 찾아 일평생을
살다 간 사람을 신으로 섬기는 일이 불교의 교리의 맞는 일인지 묻고 싶다. 나는 늘 부처님의 안쪽이 텅텅
비어 있거나, 이상한 사람들의 물건으로 채워 놓았다는 사실에 께름칙 했다. 그래서 그 깨우침이라는 것이
무엇이라는 이야기인지 속 시원한 답을 들어 본 적이 없지 않은가? 더 이상 태어나지 않고, 살지 않고,그리하여
결국 죽지 않는 일, 그것은 완전소멸이 아닌가? 더 이상 존재 해야할 아무 원인도 짓지 않는 일,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였던가?
나는 신이 있었으면 좋겠다. 있다면 찾고 싶다. 만나고 싶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신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이미 수십억겁 생애를 산 사람들이
태초의 행성 하나를 서로 나누어서 자신들이 신이 되는 경험을 쌓고 있다면 좋겠다.
정말 내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것이 들어와서 살림을 차리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왜 부처님을 외면하게 되었을까?
교회에서는 하나님과 교제 한다는 근사한 표현을 쓴다.
그렇다. 나는 신과 사귀고 싶다.
그의 있음과 나의 있음을 서로 더듬고 감지하고 느끼고 그의 있음과 나의 있음을 주고 받고 싶다.
사람의 고민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나는 발견하고 싶다.
나는 자주 출근하는 차안에서 문득 길을 잃는다.
여기가 어디이며, 이것들은 다 무엇이며, 쇠로 만든 바퀴벌레 같은 차량들이 줄지어 달리는
이 한가운데 있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아득해지곤 한다.
길을 잃지 못하는 자는 길을 찾을 수 없는 자다.
문득, 뚝, 내 밖이 아닌 내 안으로 길이 돌이켜져 모든 것이 해체되고
아무것도, 아무도 아닌 상태로 나는 자주 길을 잃고 만다.
이 모든 것이 피조물이라면
도대체 신 그대는 누가 만들었을까?
나는 문득 의문의 거대한 회오리에 말려들어 바다에서 말려 올라 온 생선처럼
사방 천지 현실이 없는 물 없는 공간 위로 뚝 떨어진다.
나는 지옥과 천국을 믿지도 않고
신을 믿는다면 지옥과 천국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존재하니까 믿를 것이다.
그런데 왜 그가 지목한 우상앞에서 그렇게도 잘하던 절을 할 수 없게 되버린 것일까?
그를 아직 믿지 못하는데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나는 그를 믿고 있는 것일까?
혼란스럽고 머리가 아프다. 자야겠다.
자고 일어나면 아무 생각도 사라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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