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균 일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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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웠다.
호주머니가 달린 옷을 세겹 입었지만 어느 호주머니에 넣어도 손이 시렸다.
음악이라도 켜면 나아질까 싶었지만 음악 때문에 바람과, 떨어진다기 보다는
나뭇잎 구름에서 내리는 것 같은 낙엽이 더 스산하게 느껴졌다. 경리는 이것
저것 서류를 주면서 수금을 준비해야 하니까 빨리 작성해줘야 한다고 숙제를
내주었다. 서류를 꾸미느라 가만히 서 있어야 하니까 내 안의 피가 더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이제 내 전동카 앞에서 철 없이 피었던 진달래는 아! 이것이
겨울이구나 하며 입을 다물고 얼어가리라.
글이란, 나의 글이란 내가 믿듯이 그렇게 정직하지 않을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이러하다, 그러하다가 아니라 내가 이러해야 한다, 그러 했으면 좋겠다인 나를
쓰면서 지줏대를 박고 그기다 자꾸 쓰러지려는 나를 묶는 일이 글을 쓰는 일인
지도 모른다.
새벽 세시 반에 함께 일어나 밥을 차려주고, 나의 지구인 아파트에 데려다 주고,
해가 지면 나를 데리러 와서 몇 발 건너 벤치에 모르는 사람처럼 한참을 앉았다
전동카 위에 무거운 통들을 올려주고, 자전거와 짐들을 늘 놓아두는 자리에 가져
다 놓고, 무슨 보물인 양 나를 태워서 퇴근하는 이 착한 남자와 함께 가난할 것을
나는 선택했고, 돈 없이도 사람은 행복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 해본 적은 없다.
아니 돈 없어서 행복 할 수 없다면 굳이 행복 할 것도 없다. 그냥 사는 것이다. 늘
행복이라는 숙제를 누가 내었는지 나는 궁금하다. 아무 맛도 없이 배릿하고
고소한 우유처럼, 쌀죽처럼, 물에 말은 맨밥처럼 그냥그냥 심심한 맛으로, 그냥
그냥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이다. 좀 더 여유가 있을 때 나는 맨살을 썰어갈 듯
바람이 차가운 날에 지리산 정령치에 가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내려 오곤 했었다.
추위 때문에 종이잔의 커피가 그렇게 맛있는 것인지, 커피 때문에 추위가 운치
있게 느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삭막한 겨울 산을 내려다보며 훌쩍이는
몇 모금의 시간이 왜 그렇게 좋았던지, 쓸쓸도 사람이 살아가는 백미구나 싶었다.
무엇이 살아가는 맛이 아니랴. 해질 녘, 손님도 없는 추위 속에 오들오들 떨다가
그의 트럭을 타고 불꺼진 집으로 돌아와서 전기 장판을 켜놓고, 순간 온수기가
토하는 뜨거움에 몸을 씻고, 간단한 주안을 함께 하는 밥을 먹고, 그의 온기와 함께
누우면 종일의 추위가 이 따스함을 위해 일부러 달려 왔던 길 같다. 정령치의
황량함과 추위가 종이컵의 커피 한 잔을 더할나위 없는 생의 맛으로 만들듯,
추위에 얼었던 몸을 몇 잔의 소주로 녹이고, 종이컵을 넘어 온, 또한 내가 낀
장갑 너머의 뜨거움처럼 안고 눕는 사람의 온기란 얼마나 따뜻한 살 맛인지 모른다.
이렇듯, 살 맛은 무엇인가 갖추어져서 어디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도
내가 발견하고 만드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번지 점프 같은 것도 하지 않는가?
괜히 공기도 희박한 눈산을 오르다 얼어죽고 크레바스에 빠져 죽기도 하지 않는가?
청룡 열차를 타기도 하고, 시렆을 넣지 않은 맨 쓴맛에 취하기도 하지 않는가? 우린
서로 사랑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 같다. 추위가 두꺼워지면 두꺼워질수록 우리
두사람 사이의 체감 온도는 더 올라간다. 어쩌면 최악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암에 걸렸고, 시골길에 나온 시골 노인들을 상대하는 그의 벌이는 온도가 높을 수록
나아지는데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는 계절이다. 나 역시 처음 하는 일이라
첫 월급이 얼마가 될지도 모른다. 아직 취업도 하지 않은 큰 아이의 휴대폰은 끊겨
있고, 내 휴대폰 요금 역시 반만 내고 간당간당 전화만 끊기지 않게 해두었다.
그러나 나는 만사를 떠올리지 않는다. 닥치는대로 산다는 것이, 급한 구멍부터 막고
산다는 것이 대책 없는 삶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대책이라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나는 알고 살아온듯하다. 나는 어쩐지 점점 더 가난해져 가고 있는데 점점 더 자유로워져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와 함께하지 않고 좀 나아지는 것보다 그와 함께하며
가난한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라는 이데올로기는 따뜻하고 착하고 순수하며 여리고
곱다. 그라는 이데올로기는 약하고, 무능하며, 무욕하다.
알람이 울린다. 세시 삼십분이다. 세수하고 일하러 나가야겠다. 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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