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유 일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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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아! 나 술 한 잔 했다.
오늘 진짜 춥더라예.
새벽엔 아파트 가로등이 꺼지는 여섯시 이전에 배달 다 돌린다고
뛰어다니느라 추운 줄 몰랐는데
오후 되니까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장부가 몇 장씩 넘어가서 내일 배달할 제품을 담을 수가 없었어요.
이렇게 추운데 있으면 피부가 얼어서 따뜻한 곳에 가면
홍시처럼 빨갛게 되고, 그렇게 되풀이 하다보면 주름이 생기겠죠?
그깟 껍데기 팽팽해서 뭐하게? 큰소리 치지만,
사람들이 이쁘다는 말을 않해도 피부 주름 없다고, 동안이라고
할 때마다, 아니라고 하면서 좋아했는데, 이렇게 찬바람 맞으면
한번 쓴 비닐랩처럼 자글자글 주름이 지겠지요?
괜찮아요.
ㅎㅎ 오늘 손님에게 잔돈 육천원을 거슬러 주는데 바람이 획 불었어요.
손님이 야무지게 돈을 받지 않아 그 돈이 바람에 다 날려 가버렸어요.
내가 바람만큼 빨리 뛰어가서 오천원은 주워 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천원이
없어서, 그냥 천원 더 드렸죠. 천원? 오뎅 두개, 붕어빵 세마리, 버스는 못타고,
천원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는데, 야쿠르트 스무개 팔아서 천원이 남지 않는데
속이 상했지만, 바람에게 욕을 할 수도 없고, 생 돈 천원을 드렸어요.
예수씨! 나 사람 만들려고 그러는거죠?
니가 지금까지 얼마나 인생을 낭비하고 살았는지 깨우치라며
이 추위에, 천원짜리 유제품 다섯개를 가질러, 팔백원짜리 우유 열개를 가지고 오려고
자전거를 타고 삼백미터는 될 것 같은 사무실을 대여섯번 더 오고 가게 만드는거죠?
근데 나 이번 주 토요일 광화문에 꼭 가보고 싶어요.
연말 시나 뭐나 연말 모임 다 가고 싶은 곳 없어요.
보고 싶은 사람도 없고, 궁금한 사람은 더더욱 없고, 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광화문 촛불에는 꼭 가보고 싶어요.
남편과 함께 가고 싶지만, 그는 가지 않을 것 같아요.
예수씨, 부디 그가 함께 서울에 가게 해주세요.
그냥, 정치적인 이유도 무엇도 아닙니다.
백만의 사람 속에 끼여 보고 싶은 겁니다.
백만의 목소리에 끼여 보고 싶고
백만의 불빛에 끼여 보고 싶어요.
백만의 사람속에 끼여서 나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요.
예수씨, 속상해요.
어머니 편찮으시니까
그렇챦아도 벌이도 시원챦은데
남편은 계속 병원 모시다 드리며 쉬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요구르트는 점점 더 팔리지 않아요.
오늘도 너무 추워서 일찍 퇴근했어요.
아침에는 집에 오고 가는 시간과 차비가 아까워서
편의점에서 1500원짜리 참치 김밥을 먹고 오뎅 세개를 사먹고
오가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주시는 붕어빵으로 하루를 떼웠어요.
춥고 졸리고 배고프고,
완전 거지가 따로 없는 것 같았어요.
예수씨,
혹시 나를 사랑하시나요?
그러하시다면 나를 지켜 주세요.
아무리 추워도, 배고파도, 궁상 찌질이 넘치고 흘러도,
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고, 궁상 찌질이가 되지 않도록,
일찍 퇴근하지 않고,
가로등이 꺼지기 전에 배달을 끝냈던 것처럼
가로등이 켜지기 전에 일을 끝내지 않도록,
나를 지켜 주세요.
힘들다고 말하면 정말 힘들어질까봐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겠어요.
정말 힘들어지면 제가 사랑해야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게 될까봐요.
어제 하루에 1300원짜리 발효유를 두개씩 먹던 사람이 배달을 끊었어요.
아침 일곱시 이전에 배달 와야 할 것이
여덟시 이후에 배달 되었다고, 발효유를 세면대에 버렸다는 여자가
냉랭한 목소리로 내일부터 당장 끊어 달라고,
왜, 그러시냐고?
그 뒤로 약속한 시간에 배달해 드렸는데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터무니 없을 정도로 밝은 목소리로,
"아! 예! 겨울엔 끊으셨다가 날씨 따뜻해지면 다시 드세요."
마치 이년아, 나도 니가 끊어 주기를 기다렸다 하는 듯이
너무 쿨하게 오케이 하니 오히려 그녀가 당황해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하루 이천육백원, 수요일엔 네개씩 들어가니까 오천이백원
빌어멱을, 하루에 170원짜리 두개씩 배달 시키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씨? 내가 뭘 반성해야 되죠? 세시 삼십분보다 더 빨리 일어 날까요?
그냥 아예 잠자지 말까요? 난 영업 못하겠어요. 이것 몸에 좋으니까
고정으로 배달시켜 드세요. 잘 모르는 사람들 붙들고 그런 말 못하겠어요.
옛날엔 잘도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정말 못하겠어요.
잠자지 말고 배달하라면 하겠고, 먹지 말고 일하라면 하겠고, 얼어 죽어도
일하라면 하겠는데 이것 좋으니까 배달 시켜 드세요..라고 못하겠어요.
저에게 용기를 주세요. 제가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예쁜 장식꽃을 달아서 샘플로 주는 미니어쳐 제품들을 흰봉지에 예쁘게 포장해
두었어요. 오늘은 이것 들고 가서 문을 두드려야지, 그런데 붕어빵 사드시는
할머니 목마를까봐 장식꽃 풀어서 드시라고 드려버렸어요. 아직도 제품통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나이 탓일까요? 이전엔 기백만원짜리 책도 팔았는데
지금은 많이 먹어봐야 한달에 사오만원 나오는 발효유를 사라고 말할 수 없어요.
찬곳에서 얼었던 얼굴이 따뜻한 곳에 오니까 화끈거려요.
괜찮아요.
온갖 주사 다 맞는다는 박근헤씨도 그 나이 먹는데
이 고생해가며 무슨 피부는 피부입니까?
죽으면 제일 먼저 썩을건데..
제발 저에게 용기를 주세요.
더 긴편지 쓰고 싶지만 자야겠습니다.
남편은 서울 가야겠다는 나의 말에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습니다.
백만 인파 속에 끼여보면 나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신이 사람과 산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건데 무엇이 싫다는 것인지..
안녕! 예수씨! 당신도 혹시 잠을 자나요?
꿈도 꾸시나요?
혹시 이 세상, 사람들, 동물들, 이 모든 일들이
당신의 꿈은 아닌지요?
당신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보다는
당신 자신을 위해 행복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멘
댓글목록
다연.님의 댓글

늘 이곳에 와서 읽어보는 재미가 쏠쏠하고
또 저번 사찰 공양주로 가신다신다는
말이 마지막같아서 쫌은 궁금했는데
다시 시작하는 삶 열심히 잘하고 있음에
박수를 보내요 화이팅요
유산균님의 댓글

ㅎㅎ 부끄럽습니다. 약 1도만 공전의 각도가 비껴나면 과오 뿐인 제 삶의 궤적들을 꼼꼼히 읽어 주셨군요.
낙엽이 다 떨어지고 나면 원래부터 나무에 잎이 없는 것인가 싶어집니다. 생겼다 사라지고, 있었다 없어지고
없었다 생겨나고, 원래 일체의 것이 그러한 것이라 장황한 변명을 늘어 놓아 봅니다.
이제 겨울이 시작 되었군요. 아무 걱정도 없이, 눈을 기다릴 뿐입니다. 건강하십시요. 다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