鵲巢日記 16年 12月 0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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鵲巢日記 16年 12月 01日
맑았다.
아침, 신문을 읽다가 의미 깊은 글귀가 있어 적어 본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자장이 정치에 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항상 마음을 국정에 두어서 게을리하지 말며 정사를 행할 때는 충실하게 하라(子張 問政 子曰 居之無倦 行之以忠)” 무릇 정치만 그러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을 해도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책임 회피다.
오전, 서부 정류장 부근에 가게를 얻은 김 씨 내외가 왔다. 가게는 13평이다. 보증금 3천에 월 200이다. 사거리에서 약 오십 미터 안쪽 조금 더 들어간 도로가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화원 A 카페에서 일했다. 올해 나이 40 중반이다. 김 씨는 커피 하는 건 괜찮은지 자문했다. 나는 커피 일 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물론 그 주위로 커피 집 없다 하더라도 커피 일 하는 것은 힘들겠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대신, 국수집하는 것은 어떠냐고 도로 물었다. 로고와 상표를 디자인하며 상호를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국시는 밀가리로 만든다.’ 이런 서술형도 괜찮지 싶다. 상표 등록도 신경 써야겠다. 가맹점을 하는 것보다는 가맹사업을 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주체적이어야 한다. 물론 국수 물 우려내는 것도 기술이며 국수를 삶는 것도 기술이다. 어디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터넷에 공개가 많아 여럿 프로그램 보고 실습해 나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커피는 나는 아니라 본다. 커피 집을 개점하고도 나중에 그 옆에 또 들어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요즘은 무분별하게 커피 집 들어서니 커피를 하는 나로서도 솔직히 선뜻 하라는 말은 어려웠다. 김 씨는 채소가게는 또 어떤지 묻기도 했다. 아는 선배가 있는데 ‘아저씨’라는 상호로 꽤 성공한 집을 예로 들었다. 서부 정류장 부근 노점도 많고 유사 점포도 많아서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오후, 채 선생님과 함께 팔공산에서 한티재 넘어가는 길로 하여 순회했다. 나는 파계사 방향과 동화사 가는 길은 몇 번 간 적 있었지만, 한티재 넘는 이 길은 솔직히 몇 년 만이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도로 양 길가로 꽤 발전한 모습을 보았다. 커피 집은 한 집 건너 한 집이다시피 모두 신축 건물과 다름없이 깔끔하며 멋지며 모텔과 여러 숙박 시설로 가득한 거리였다. 문제는 저리 많아도 아직도 개발할 땅은 많아 보인다는 것이다. 오후 3시쯤 이 거리를 죽 지나며 보았는데 카페마다 손님으로 가득해야 할 시간에 모두 비었다는 것도 이색적이며 이 중 한 군데 들렸는데 100평 가까운 카페에 손님으로는 남자 손님 한 분 앉아 커피 마시는 거였다. 그리고 우리가 들러 아메리카노 두 잔과 초콜릿케익을 주문하여 카페에 관한 말을 계속해 나갔다. 물론 여기까지 온 것은 어느 특정한 집을 보기 위함이었다. M 카페에 여러 돌조각상과 미술작품을 보기 위함이었다. 사진 꽤 담았는데 나는 정말 한강 이남에서는 최대의 작품을 보유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순신 장군 상 같은 석공예품과 사자며 돼지며 해태상 같은 석공예품과 인공 연못과 오작교 같은 것도 있었는데 나는 그 위를 일부러 거닐어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채 선생과 죽 거닐며 사진도 담고 하니까 저쪽 펜션 같기도 한 건물에서 오십 대 후반쯤 되는 아재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 아닌가! 아재는 우리에게 한 말씀 주셨다. 이런 돌조각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 내가 소장한 다른 미술작품도 있어 보여드리고 싶다며 인사를 주시는 거였다. 우리도 인사를 하며 아재 따라갔는데 미술 소장품이 있는 곳은 M 카페 바로 옆에 1층 건물이었다. 아재는 이 미술작품을 경매시장을 이끌면서 하나씩 장만한 거로 보였다. 괴상한 돌도 다이아몬드와 같은 돌도 미끈한 것도 거친 것도 수입한 것도 여러 번 갈 면은 모양이 생긴다는 그런 돌도 있었다. 이조 때 쓰던 엽전도 한 꾸러미 있었고 이 엽전을 보관할 수 있는 궤짝도 있었다. 궤짝은 그야말로 조선 시대 양반 내들이 쓰던 그런 물건이었을 것이다. 사람 한 길은 족히 되었고 높이도 성인 무르팍 정도는 되었으니까 말이다. 이 궤짝 하나가 천오백만 원짜리라며 귀한 말씀까지 있었다. 그러니까 궤짝도 장석을 뭐로 했느냐에 따라 시대 구별이 된다는 거였는데 우리는 들어도 뭐 알면서 듣지는 못했다. 그런가 보다 하며 탄식만 했다. 물론 이 것뿐이었겠는가! 도자기며 동양화며 오강(요강)단지며 홍두깨 다루깨 소죽 끓일 때 쓰던 성냥갑이며 사랑방에 있을 법한 화로도 있었다. 참말로 그 어떤 관람료 한 품 없이 구경 한 번 잘했다. 아재께 정중히 인사드리고 우리는 나왔다. 나오는 길도 들어갔던 길이 좀 석연찮아서 카페를 거쳐 나왔는데 카페는 내나 조용했다.
오후 네 시쯤 해서 다시 본부로 길 나섰다. 가면서 채 선생은 연못을 자꾸 말씀하였다. 어떤 연못을 갖출까 하는 고심이 보였다. 또 어떤 아주머니 얘기도 있었고 정치 얘기도 있었다. 요즘 속 시끄러운 현직 대통령과 그 주변에 관한 이야기다. 이리 좋지 못한 경제에도 불구하고 오늘 여럿 보고 온 이 사실은 경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인다.
저녁, 뉴스타파의 ‘친일과 망각’2부를 시청했다. 우리나라는 해방은 되었지만, 친일한 세력가로부터는 아직 해방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나라는 친일 세력가의 후손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테다. 정치인, 기업인, 대학교수, 문화예술과 법조인, 언론인까지 기득권층을 이루는 명문가 집안은 대부분 친일파 후손이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들 후손 1/3은 일명 SKY 대라 불리는 명문 대 출신이며 27%는 유학경험이 있으며 14%는 파워엘리트 그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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