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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유 일기 8. 생활화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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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유산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85회 작성일 16-11-19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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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내렸다.

배달을 하거나 제품을 출고 받으러 전동차를 끌고 다닐 때는 더워서 벗어 두었다

가만히 앉아 손님을 기다릴 때는 추워서 껴 입었던 조끼며 패팅옷의 부피 때문에

오늘따라 늘 가지고 다니던 비옷을 챙겨 오지 못했다. 맞은편 마트 사장의 눈치를

보느라 길가에서 한 옆으로 돌려세우고, 핸들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반대 방향으로

두어 비치 파라솔은 내가 선 반대 방향의 비를 가리게 되었다.

오늘 새벽엔 세시 삼 십분에 일어나 새벽밥도 먹지 않고 금, 토, 일 삼일치의 제품을 돌리느라 진땀을 뺏는데 월요일 배달 분량도 만만치 않아 미리 동별로 배달할 제품을 싸두고 퇴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동별로 제품들을 한 봉지에 싸서 손잡이에 포스트 잇을 감아 동수를 표시 했는데 비를 맞아 포스트 잇에 적힌 동호수가 퉁퉁 불었다. 마지막113동의 포스트 잇을 감을 때는 패딩 잠바의 소매에서 빗물이 질질 흘렀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스스로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문제를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문제로 삼게 되는 일인 것 같다. 비가 와서 비를 맞고 비에 젖는 일이 뭐가 어쨌다는건가? 감기에 걸릴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비는 오고 나는 비를 맞아야 할 뿐인데..다행히 아직 빗방울의 체온은 그리 차갑지 않았고, 나는 월요일 아침, 고객님들로부터 배달이 잘못 되었다는 전화를 받게 되는 것이 소매에서 빗물이 흐르는 옷을 입고 서있는 일보다 두려운 문제로 느껴지는 것을!  오가는 사람들의 걱정 섞인 인사와 눈길이 빗물이 튀어 젖은 장부를 보며 1호 2호 라인과 3호 4호 라인을 햇갈리지 않고, 월요일 제품이랑 화요일 제품이 햇갈리지 않게 제품을 꾸리는데 집중해 있는 내게는 비를 쫄딱 맞는 일보다 더 큰 문제로 느껴졌다.


오늘, 새벽 배달을 다 끝내 놓고 잠깐 집에 자려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중학교 담벼락 뒤에 "자전거를 생활화 합시다"라는 문구가 보였다. " 빌어먹을, 생활화 하고 싶지 않아도 자전거가 생활이다"하고 뇌까리며 졸음이 쏟아질수록 더 세게 페달을 밟았다. 생활화 하라는 것은 어떻게 하라는 뜻일까? 강변 고수부지에 있는 자전거 대여점 이인용 자전거처럼 자전거를 즐기지 말고, 밥을 먹듯, 밥을 먹고 양치질을 하듯,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하듯, 일상적으로 나와 불가분의 행위가 되어 아무 생각 없이도 그것을 하도록 하라는 뜻일까? 문밖을 나서면 에레베이트 버튼을 누르고, 타고, 내리고, 안면 있는 얼굴이 보이면 반사적으로 안면 근육을 펴고 인사를 하고, 그러듯이 자전거를 타라는 뜻일까? 난 아직도 살기 위해서 되풀이 하는 일들을 생활화 하지 못한 것일까? 세 동의 제품만 실어도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져서 애써 싼 제품들을 철벅철벅 바닥에 내동댕이 치고 우유와 야쿠르트를 터지게 만드는, 그 순간, 아이구, 이 씨발 자전거야!하고 내게서 과분한 인격이 되는 자전거는 내가 장부를 정리하거나 손님이 없어 시집을 읽고 있을때는 늙고 정든 개처럼 아파트 장식 기둥에 기대서서 어쩌다 내 시선이 자신의 모습에 와 닿기를 기다리고 있는듯 하다. 그는 내게 나타난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 내게 가분(可分)의 존재다. 비 또한 그러하다. 나는

사십여년 동안 무수히 많은 비를 맞았지만 한번도 그 비가 지긋지긋하거나 제발 좀 그쳐주기를 바랬던 적이 없었다. 차라리 맑은 날이 지속되면 제발 비가 좀 와 주기를 바랬던 적은 있다. 가랑비, 보슬비, 소낙비, 장맛비, 여우비, 장대비, 비는 이름도 많고 느낌도 종류도 많다. 나는 아무리 비를 맞아도 비가 생활화 되지 못했던지 젖은 바람이 불고 하늘이 스님들의 옷으로 갈아 입으면 어떤 비라도 맞을 각오로 가슴이 설레인다. 그런데 오늘은, 비에게도 이놈의 씨발, 비!라고 인격적인 발언을 하고 말았다. 일주일을 끙끙대며 겨우 만든 장부, 내가 만들어 준 칸에서 명료한 세월을 보내고 있던 글자와 숫자들이 불어터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마르면 종이는 울퉁불퉁 자신을 적시고 간 세파를 기록처럼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말랐을때는 비닐봉지 손잡이에 잘도 달라붙어 착 감기던 포스트 잇이 도무지 구실을 하지 못하고, 유제품 보관 상자 두껑엔 빗물이 고여서 한번 열 때마다 나이아가라 폭포가 된다. 내게 생활화라는 단어가 착 감기는 유일한 분야인, 욕이 또 목구멍을 간지럽힌다. 그러나 참는다. 나는 칠백 가구의 공인이므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쏟으며 열린 나의 유제품 보관 상자에는 꼭 낙엽이 한 두 잎 달라 붙어 있다. 일부러 꼭지를 따지 않는 사과나 감처럼 낙엽이 붙어 있는  구백 삼십밀리 병 우유는 훨씬 더 신선한 느낌이 든다. 물론 불결하다는 느낌을 갖는 사람도 있겠지만 낙엽을 보며 그런 느낌을 더 먼저 가지는 사람에게 나의 우유를 팔고 싶지 않다는 나의 느낌도 있다. 그렇다고 일부러 낙엽을 내버려 둔 건 아니다. 그렇다, 예수님아!, 나는 또 그대에게 기도한다.

세상 모든 나무가 그들이 가진 모든 낙엽을 내게 다 떨굴지라도 내 삶이 낙엽에 매몰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세상 모든 구름이 그들이 가진 모든 눈 비를 내게 다 쏟을지라도, 내 느낌이 빗물에 수몰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우주의 모든 태양이 나만 째려 볼지라도

내 기쁨이 햇빛에 말라 죽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디 제게로 와서 제게 닿는 모든 것들이 그 무엇도 생활화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불가분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늘 낯설고 신기하게 하여 주시옵고, 이 씨발놈의 자전거, 비, 햇빛, 낙엽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살아서 만나는 누군가처럼 애증이 오가는  귀한 존재들로 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끔 나는 경비실 아저씨들이 바닥을 쓸다가 벤치에 걸쳐놓은 대빗자루를 들고 낙엽을 쓴다. 뻣뻣한 대가지들이 딱딱한 보도 블럭을 긁는 소리가 가려운 등을 긁는 소리처럼 슥슥

시원하다. 마치 한곳에 모이기 위해 떨어진 듯, 대빗자루에 쓸려 한 곳에 모인 낙엽들의 조우가 쓸쓸하고 따뜻하다. 그곳이 우리집 마당이였다면 불을 놓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깔아놓은 아스팔트나 시멘트 보도 블럭으로 스밀곳마저 잃은 낙엽들을 일부러 나무와 화초를 심어 놓은 화단 깊숙이 쓸어준다. 낙엽이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낙엽이 흙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낙엽이 쓰레기가 되는 것은 낙엽의 생활화 일 것이다. 빗물이 구정물이 되는 일 또한 비의 생활화 일 것이다. 바다가 지긋지긋한 일터나 무덤으로 느껴지는 일 또한 바다의 생활화 일 것이다. 그러나 가끔 거리의 청소부가 담배를 피워물고 빗자루를 뉘어두고 화단 난간에 앉아 또 가을이 가고 있구나 라고 생각의 끝을 허공으로 피워 올리는 순간 생활은 승화에 이를 것이다. 시인의 몫은 그 담배 한 개피라는 생각이 든다. 길거리에 서서 손님을 비오는 날은 더더욱 먹고 싶어지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발효유 아줌마에게 비를 보여 주는 일, 생활화 되어, 불가분이 되어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해주는 일,  아줌마! 눈 와요!

길바닥이 미끄러워서 큰 일인 전동차가 아니라 어쨌거나 하얀, 새하얀, 남들은 그 눈이 보고 싶어 창문을 열고 점심 시간을 기다려 옥상으로 올라가거나 엘레베이트를 타고 바깥으로 나와야 하는데, 그냥, 그 자리에서서 하던 일하며, 야쿠르트 스무개 값을 받아 지폐 주머니에 접어 넣으며. 지나가던 공익 근무 할아버지가 인심 쓰고 가시는 따끈따끈한 붕어빵과 열렬한 키스를 하며, 비치 파라솔에 쌓이는 것을 털어가며,  주먹만한 눈사람을 만들어 벤치 위에 앉혀 놓고 친구 하며, 아! 그대에게로 눈이 오고 있다고, 시인이여! 말하라.

뜨거운 물에 손을 녹여가며 맨손으로 상추 한 박스를 씻는 횟집 주방 이모에게 그 찬물이 그대에게 흐르고 있어 봄이 오고 있다고, 고기 잡는 횟집 뒷 주방에 서서 바큐 날리는 중지 크기의 보리밀 한 상자를 잡는 그 이모에게 이 작은 물고기 한마리도 어느 한마리 빠진 것이 없는 생명의 장치들, 비늘 한 잎의 갯수도 똑 같을 것이다. 아가미 밑을 쭉 타면 빠져 나오는 것들, 살아서는 봄 처녀들의 스카프처럼 우아하게 하늘 거렸을 것들, 얼마나 생은 공평한가를,  잘못 되어 봐야 일이천원 안팎의 제품이 잘못 배달 되었다고 하는데도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실수 없도록 할께요. 짧은 통화에 얼마나 자주 많이 죽도록 죄송한지,  나라 전체를 자신이 찍어 준 국민이 아닌 엉뚱한 사람에게 배달 해놓고도 딱 두 번 밖에 죄송하지 않은,  너희들이 촛불 따위로 무엇을 하랴? 폴리스 라인 안쪽에서 얌전히 타오르는 촛불 따위로 너희들이 무엇을 바꾸리? 끄떡도 하지 않는 계란 한 알 낳지 못하는 닭도 있는데, 그대여! 천 팔백원짜리 야채 두껑 색깔을 초록으로 보내야 되는데 흰색으로 보냈다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죄송하고 미안한 그대여! 사람이라 사람의 자식을 낳고 기르느라  촛불처럼 오는 바람, 가는 바람에 펄럭이며  죄송함으로 밝히는 양심의 사위여! 그 정직하고 밝은 길로 아이들이 가라고, 제 땀방울 떨구어 발 붙인 자리에 종일 서서 타들어가는 작은 불꽃이여! 몇 십억 광년 너머의 태양보다 가까이 있어 더 밝은  빛이 되기 위해, 바로 내 곁에 서기 위해 한 촉으로 나툰 그대, 야쿠르트 복장의,  몸빼와 위생모를 쓴, 앉은뱅이 똥판을 엉덩이 밑에 깔고 달팽이처럼 들판을 기어다니는, 고래를 조련 시키는 조련사처럼 돌아가는 붕어 빵틀에서 뜨거운 붕어빵을 튀어 오르게 만드는, 마트 계산대에 종일 서서 통무처럼 다리가 퉁퉁 부어오르는, 보험 계약서 사인을 받느라 두 시간을 기다리고 앉은,

떠 먹이는 죽은 먹지 않고, 자꾸만 몸에 손을 대는 치매 노인의 손을 떼느라 자꾸만 죽 숟가락을 놓는, 와사비, 초장 간장 된장, 음료수, 딩동 딩동, 안녕히 가세요. 어서 오세요!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벌써 주문하지 삼십분이 지났는데, 지금 뭐하는 겁니까? 예..죄송합니다. 오늘 손님이 좀 많아서요. 죄송, 죄송, 내가 음식 만드는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 몫까지 다 죄송한, 종일 열두개의 가스불 앞에 서서 오백 그릇 천 그릇 뚝배기에 돼지 국밥을 끓여내는, 그저 죄송함과 감사함이 관절염 류마치스 디스크에 걸리고도 스스로는 멀쩡한 사지육신 가져 다행이라는 몸뚱아리 같은 촛불들이여!


백만의 그들이 태우고 있던 것은 초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다.

헌신이 생활화 되어 있는 그들이,

오, 나의 예수씨! 그들이 그들의 빛을 발견하게 하는 것을

그들의 불가분을 가분으로 만드는 것을

저의 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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