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균 일기 2(붕어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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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는 일이 참 어중간하다. 집을 가자니 차비가 2600원, 가장 비싼 발효유 한 병 값이다. 그런데다 집에 가면 다시 나오기 싫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어리숙한 셈법으로도 햇볕의 양과 발효유 판매량은 비례 할 것 같다. 춥다는 느낌이 들면 손이 가지 않는 것이 음료다. 그리고 식후나 식전에 마시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고 식당에서 사먹자니 짜장면 한그릇도 4500원이다. 가장 비싼 발효유보다 더 비싼 치즈 하나 값이다. 다행히도 몇 발 건너 길가에 붕어빵과 오뎅을 파는 천막이 있어, 붕어빵 세마리와 오뎅 하나, 증정용으로 나오는 발효유 한병으로 점심을 떼운다. 그리고는 전동차를 끌고 사무실로 가서 내일 배달할 제품들을 출고 해온다. 내일 배달할 곳의 장부를 정리하느라 엎드려 있으면 스쿨죤 교통 정리를 하러 나온 공익 근로 노인들과 유모차를 밀고 가던 할머니들과 경비 아저씨들이 오며 가며 하나씩 붕어빵을 건내 주신다. 거절하기도 뭣해서 주는데로 먹다보면 나중에는 붕어빵처럼 배가 불러온다. 붕어빵 할머니는 이전에 있던 여사님과도 친했던지 판매에 대한 여러가지 조언을 해준신다. 야쿠르트를 열개, 스무개 서른개씩 봉지에 담아 놓으면 차를 타고 가다 크락션을 누르는 손님들에게 빨리 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지폐를 만원권 오만원권, 천원권 한데 두지 말고 천원권 오천원권만 따로 두고 잔돈을 많이 바꿔 오라고도 하셨다. 맞은 편 마트에서 "남의 장삿집 앞에서 장사를 하시면 어떻해요? 우리 아저씨가 한 번 말한다고 벼르는데 다른 곳으로 가세요"라며 어름장을 놓을 때도 아파트 단지내 상가가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귓뜀 해주셨다. 아파트 정문과 후문 사이는 주민들의 민원이 가끔 들어와 마땅치 않다고도 하셨다. 내심 노점상 철거 대상인 것 같아 서글픈 마음도 들었지만 그기 말고는 마땅한 자리가 없는 것 같다. 가격을 외우지 못하고 있는데 손님들이 가격을 더 잘 알고 있기도 했다. 이 일을 한건 잘 한 일인 것 같다. 나는 사실 이전에는 노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도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었다. 뇌기능의 퇴행으로 사고가 굳고 젊은 시절부터 고착된 욕심들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고,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에렉투스와 말하는 기분마저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의 고요와 잔잔함과 속도가 마음에 든다. 햇빛에 반짝이는 흰머리가 그들을 신선으로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할머니들은 수녀처럼 깨끗하게 느껴진다. 날마다 정오 무렵에 운동을 나오시는 전직 교장 선생님과 요양사가 나오지 않는 날은 궁금해지고 보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밀고 다니는 유모차에 야쿠르트 열개를 실고 가시는 할머니는 야쿠르트를 사지 않는 날엔 괜히 미안해 하시는 것 같다.
하재연 시인의 시집을 읽고 있다. 가끔 손님이 아주 없는 시간엔 멘델스 존의 바이얼린 협주곡 마단조 64번을 듣는다. 이어폰을 끼면 나를 부르는 크락션 소리나 손님들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냥 듣는다. 신기한 건 음악을 켜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순간부터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나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것 같다. 한 웅큼의 낙엽이, 나무가 뿌리는 것처럼 떨어진다. 음악이 가장 격정적인 순간엔 나뭇잎도 바람도 격정적으로 움직이고, 바이얼린 선율이 한 가닥만, 긴 머리카락처럼 나부끼는 순간엔 나뭇잎도 한 잎만 공중을 돌며 느리게 떨어진다. 하재연 시인의 상상력은 발랄하고 경쾌하고 신선하다. 좋다. 사각으로 벤치가 에워싼 나무가 등을 빌려주는 연인 같다. 늦가을 햇살은 맑고 잠자리 날개처럼 얇다. 내가 임종 할 때도 이 음악을 들으며 죽고 싶다. 늦가을 햇빛을 눈부시게 올려다보며 길동무 하듯 떨어지는 잎들과 함께 가고 싶다. 이 음악은 16세의 장영주가 연주하는 것이 제일 박력있고 섬세하다. 음악을 잘 모르지만 내 서툰 귀에는 그렇다. 노안이 심해져서 돋보기를 끼지 않고는 글자가 흐릿하게 뭉개진다. 금방 말한 아파트 동호수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조기 배달하는 집들을 뛰어서 돌고 나면 머리가 핑 돈다. 내가 늙어가는 증상들이다. 한 빵틀에서 찍어 낸 붕어빵이다. 65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투표권을 제한하자는 정동영의 말엔 아직도 공감하지만 나는 확실히 늙어가고 있다. 어떤날 햇빛을 받으며 등을 구부리고 있으면 내가 노락노락 익어가는 느낌이 든다. 지팡이와 유모차와 요양사에게 의지 해야 겨우 걸을 수 있는 그 날에 나는 어떤 시를 쓰게 될까? 그날의 내 시를 읽기 위해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어떤 노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들 또한 그렇게 늙어 왔으리라. 다만 나는 그 때도 내가 시를 쓰고 있었으면 좋겠다. 멜라닌 색소가 완전히 빠져 나간 그들의 흰머리처럼, 염색도 하지 말고, 핀을 찌르지도 말고 파마를 하지도 말고 짧고 깨끗한, 시를 썼으면 좋겠다.
자전거를 하나 장만해야겠다. 점심도 붕어빵으로 떼웠는데 노인들이 자꾸만 주시는 붕어빵을 빵광고 찍듯, 맛있는 표정으로 먹는 일이 정말 고역이다. 맛있는 붕어빵에 더 이상 물리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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