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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균 일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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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유산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56회 작성일 16-11-07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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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동 1002호에 가기 위해 에레베이트를 탔는데 어떤 중년 부부가 낑낑대며 침대 매트리스를 싣고 있었다. 발효유와 우유가 가득 실린 손수레를 놓고 함께 힘을 쓰는 시늉을 했는데 고마웠던지, 마침 필요 했던지 930밀리 짜리 저지방 우유를 월 수 금 넣어 달라는 것이였다. 역시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예수씨,  한 군데 고정 배달이 끊겨서 속상했는데 딱 그 가격, 그 요일 그대로 일이 이어졌다. 사실 우리 예수씨는 그렇게 할 일 없는 분이 아니다.  가난한 요구르트 아줌마 매출에나 신경 쓰는 일 없는 분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는 혹은 신은 이미 모든 것을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들의 자질구레한 부탁을 들어 주고 있을 까닭이 없다. 우리는 그를 통해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미 준 것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야 할 것 같다. 어쨌거나 예수씨는 나의 친구이기 때문에 나는 이런 저런 속상한 이야기를 늘어 놓으며 속풀이 해장국 같은 기도를 하는 것이다.

오늘, 그리고 저번 토요일에도 전직 교장 선생님과 요양사는 보이지 않았다. 유모자를 끌고 와서 요구르트 열개를 싣고 가시는 할머니는 내가 주는 증정용 요구르트를 사양하다 마시며 한참을 놀다 가시고, 붕어빵 할머니는 팥떡을 들고 와서 한참을 앉았다 가시고 나는 그 답례로 얼려 먹는 요구르트와 가격이 똑 같은 오뎅을 하나 먹었다. 요구르트를 서른개 팔아야 오백원이 남는다고 생각하면 모든 가격이 엄청나게 느껴진다. 난 사실 돈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서 있지 않은 사람이였다. 꼭 쓰야 할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구분이 없었고, 대책없이,  수중의 돈이 바닥날 때까지 물처럼 썼다. 쉽게 벌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고, 가고 싶은 곳을 갔고,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별 문제 없는 것이 돈이라 여겼다. 다행히도 어떤 개고생에 직면해도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여행이라 여기는 습관이 있어 모든 일이 신기하고 재미 있기도 했었다.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일도, 남들이 불쌍하게 여기는 일도, 나는 관찰자의 입장 같은, 영화를 관람하거나 책을 읽는듯한 한 발 건너의 여유가 있었다. 돈 천원이 없어 버스를 타지 못하고 터덜터덜 걸어 가면서도 걱정은 돈이 아니라 시였다. 어쨌거나 지금은 백원도 천원도 돈으로 보인다.  백원에도 십원에도 벌벌 떤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수전노가 되었나? 왜 이렇게 이상한 인간이 되었지 하는 자괴감보다 내가 뭔가 훨씬 이전에 알았어야 할 가치를 이제사 알게 된 것 같은 뿌듯한 감동마저 느껴진다. 몇백원의 무게를 알게 되어 기백만원 짜리 옷도,  신발도 가방도 모두 허망한 껍데기로 보인다. 마치 개미가 코끼리를 보며 저 큰 덩치가 무슨 소용이지? 하고 느끼는 것 같다. 오뎅 같은 건 큰 양푼에 열댓개씩 놓고 먹는 것이라고만 여겼지, 달랑 하나 먹고 꼬챙이를 헤아릴 것도 없이 오백원 짜리 동전 하나를 내미는 것인줄은 몰랐다. 심지어는 호스트 바 선수를 데리고 놀면서 양주값 사오십 만원을 나만큼이나 얼빠진 년들과 더치페이 해서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놀았던 적도 있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살림을 모른다. 누구를 남편으로 두고 살건 간에 돈을 벌면 그냥 주었다. 관심이 없었고 신경 쓰기 싫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그런 여정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렇게도 살아보고 이렇게도 살아보는 것이다. 남의 것 뺏은 적 없고, 남을 속인 적 없고, 어쨌거나 내가 벌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유이건 방종이건 누렸으니 홍콩도 가보고 런던도 가보고 북극도 남극도 가 본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때는 그때대로 지금은 지금대로 좋다. 요구르트 이천원치는 열 두개다. 열 한개를 넣으면 손님이 백 삼십원을 손해보고 열 두개를 넣으면 내가 40원을 손해 본다. 어쨌거나 손해보는 장사다. 요구르트 이천원치를 배달하기 위해 아파트 한 단지의 끝에서 끝으로 걸어가다보면 이 세상 모든 작고 하찮은 가치들이 엄청나게 느껴진다. 오뎅 한 개 값을 벌기 위해 끝과 끝을 건너고 에레베이트를 타고 몇 번이나 감사해 하다 보면 오뎅 한 개가 한우 특수 부위 한 점보다 맛있게 느껴진다. 4500원짜리 짜장면도 한그릇은 배달해 주지 않는다는데 나는 170원짜리 요구르트 두 개도 배달 해준다.


나는 가난하다. 돈이 없다. 그런데 나는 실감을 못한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단 한번도 비가 내리지 않았다. 나는 날마다 일기 예보를 보며 비를 기다린다. 빨리 요구르트 회사에서 지급하는 핑크색과 아이보리 색의 예쁜 비옷을 입어 보고 싶어서이다. 돈을 벌면서 비가 오는 것을 볼 수 있고, 비를 맞을 수도 있고, 비치 파라솔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니..눈이 온다면 또 얼마나 근사할까? 추운 겨울이 와서 내 숨이 털옷을 입은듯 김을 풀풀 날리며 붕어빵 할머니에게 붕어빵 천원어치를 사서 유통 기한이 간당간당하는 발효유와 함께 먹는 상상을 하면, 난 참 잘 태어난 것 같다. 보온병을 하나 사야겠다. 뜨거운 물을 채워 다니며 겨울 볕을 쬐러 온 노인들에게 커피를 대접해야 겠다. 마치 온세상의 집 밖이 내 집 거실인양, 비오는 날은 녹턴을 듣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는 아마도 황홀해서 미칠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예수씨! 오늘 나의 기도는 내일 비가 내리게 해달라는 것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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