鵲巢日記 16年 08月 2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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鵲巢日記 16年 08月 29日
대체로 맑았다. 오후, 사동에 길 나설 때였다. 산 능선이 선명하고 그 위 뜬구름이 두터운 것도 있고 얄팍한 것도 있어 경관이 무척 아름다웠다. 뚫린 하늘은 깊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아! 가을이 왔는가 보다.
마치 폭풍 전야인 듯이 조용했다. 오전에 전화 한 통 받았다. 구미 모 카페다. 울진에 더치 공장하시는 이 사장께서 파신 기계다. 기종은 산레모 베네치아다. 한 번씩 우웅웅 거리며 소리가 난다고 했다. 여러 가지 상황을 얘기 들으니 모두 정상이다. 커피를 뽑을 때 한 번씩 옆으로 물이 샌다고 했는데 고무가스겟이 교체 시기가 지난 것 같다. 모 카페 사장께 이거는 소모품이라 한 번씩 교체하며 기계를 사용해야 함을 설명했다. 마치 자동차를 사면 엔진오일이나 타이어도 적절한 시기에 교체해서 사용하듯이 말이다.
오후, 서울 모 상사에 소스류 일괄 주문 넣었다. 네다섯 시쯤에 화원에서 사업하는 후배 이 씨가 전화 왔다. 전라도 쪽에 지인이 창업 준비한다. 기계를 물었는데 시모넬리 기종이라 하고 11년산인데 가격이 180만 원 한다며 괜찮은지 묻는다. 가격은 그 비싼 것도 싼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용한 지가 5년이 넘은 거라 선뜻 하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계로서 실은 활용가치는 없다. 중고는 2년 이하면 좋겠다.
이덕일 선생의 ‘근대를 말하다’ 3장과 4장을 읽었다. 일본은 경술국치를 단행하고 그러고 보니 오늘은 106년 전 그날이다. 조선을 어떻게 통치했는지 그 구조를 읽었다. 한마디로 공포정치였다. 헌병경찰제도를 도입해 심지어 학교 교실까지 칼을 차고 들어갈 정도였다. 일제는 한국인에게만 적용하는 혹독한 태형을 감행했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농민의 토지를 교묘하게 수탈했다. 학교 설립도 쉽게 할 수 없었으며 각종 규제가 심해서 한동안 사학이 설립되기도 했으나 이것마저도 감시감찰과 결국 탄압에 이르러 상당수 문을 닫았다. 일제는 한 손에 대포와 한 손에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고 할 정도로 조선의 밤 문화를 창기 문화로 타락시켰다. 대한제국은 1895년 갑오개혁 때 관기官妓제도를 혁파했다. 지금의 술 문화가 좋지 않은 것은 모두 일제강점기 때 남긴 악습이라 보면 된다. 일본은 우리 조선을 식민 지배했지만, 정치나 경제의 발전을 도모하여 자본 집약적인 고도의 지배를 했다기보다는 식민지 성장을 억제하여 저개발 상태로 두며 노동력이나 지하자원 따위를 갈취하는 방법만을 썼다. 민간인은 회사를 설립하고자 해도 허가를 받아야 하는 허가제였다. 일본은 당시 신고제였다.
4장, 운동의 시대는 고종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3.1운동 전개과정을 담았다. 고종의 해외망명은 여러 차례 기회를 만들려고 했지만, 운이 맞지 않았다. 결국, 이완용 숙직 다음 날 급서하게 되는데 이는 독사설로 이어 3.1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책은 아주 자세히 기술해 두어서 당시 상황이 마치 눈앞에 전개되는 듯했다. 일제강점기면 할아버지 세대나 증조부 세대쯤 되지 않을까! 지금 세대는 당시 할아버지의 혹독한 시절을 모두 이겨냈기에 대한민국 국가의 틀에 온전히 자유의 몸을 누리며 꿈을 펼치는 것이리라! 지금 세대는 나라를 잃은 그때 할아버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가난이 무엇인지 가난보다 더한 공포감으로 둘러 싼 혹독한 일제 노예의 삶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있을까 말이다. 국토를 짓밟고 민족을 말살하며 갖은 욕을 보인 일제,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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