鵲巢日記 16年 07月 2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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鵲巢日記 16年 07月 24日
맑았다가, 오후 늦게 흐리더니만 천둥 치다가 비까지 내렸다.
종일 본부에 있었다. 오후, 본점에서 책 읽었다. 다시 본부에 와, 책을 읽다가 다시 본점에 가서 책 읽었다. 저녁에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쓰신 ‘조선상고사’를 읽기 시작했다. 100여 쪽 가까이 읽었는데 총론과 수두시대에 해당하는 글이다. 총론은 단재 선생의 역사관을 잘 보여준다. 역사란 무엇인지? 여기서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단재의 명언이 나왔다. 그리고 묘청과 김부식과의 관계를 조명하여 우리의 역사관에 대한 선생의 철학을 엿볼 수 있었으며 한 역사서를 쓰기 위해서는 주변국의 관련 자료와 언어까지도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피력했다. 이는 한 국가의 활동범위를 캐기 위한 지명에서도 이미 시대는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이 흘렀기에 하는 말이겠다.
단재는 몹시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했다. 어려운 집안에도 불구하고 단재 선생은 독서광이었다. ‘조선상고사’는 신채호가 독립운동으로 10년 실형을 받고 투옥된 지 3년째 1931년 6월부터 조선일보에 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엮은 것이다. 그해 10월 백제 부흥운동을 끝으로 연재를 중단했다. 1931년 12월 조선일보에 실린 ‘10년의 고역을 무사히 마치고 나오게 된다면 수정하여 발표하겠다.’라는 신채호의 글로 미루어보아 수정하고 보완할 의지가 있었으나 건강이 악화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미완으로 마친 신채호의 연재 글 ‘조선사’는 신채호가 순국한 지 12년이 지난 1948년에 ‘조선상고사’로 이름을 바꿔 출간했다. 당시 신채호의 글은 민족성을 일깨우는 파격적인 글이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해 본다. 지금은 역사 유적발굴과 논문 발표, 매스컴에서 보도한 우리의 역사 바로 알리기 위한 각종 매체를 접하니 말이다. 하여튼, 조선상고사 읽기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매우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단재는 우리의 역사가 소극적 방향으로 흐른 것은 몇 가지 큰 사건이 있었다며 지적한다. 예를 들면 묘청과 최영 장군, 우왕은 모두 북벌론을 주장했다. 실지로 고려 초까지는 우리 민족이 중국보다 국력이 더 강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을 통일하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명목으로 조선 한반도에 상륙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했을 때 호족세력의 통합으로 결혼동맹이 아닌 그 막강한 지역의 힘을 통합하여 북벌로 이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미련한 생각도 해본다. 대진국이나 금도 있었다만, 이들 국가도 동이족이며 우리 민족이라는 것도 알아두자. 물론 그 이후 정도전도 있었다. 하여튼, 통일된 만주 일대의 역사를 새로 쓸 기회가 사라진 셈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독립운동의 무대로서 활동한 지역이기도 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통한 민족성 말살에 우리는 바른 역사를 배우지 못했다. 아직도 일제의 잔재가 묻은 역사관은 곳곳 볼 수 있음이다. 뿌리가 없는 나무는 잎이 있을까! 아무튼, 조선상고사, 뭔가 일깨우는 듯 단재의 숨소리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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