鵲巢日記 16年 07月 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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鵲巢日記 16年 07月 25日
흐렸다가 간간이 퍼붓는 장대비 있었다.
오전, 청도에 다녀왔다. 경산과 청도로 잇는 남성현 터널 가기 전, 경산 남천을 지날 때 억수로 비 왔다. 청도에서 일 볼 때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이 터널을 지나자마자 퍼붓는 비로 좀 놀라기도 했다.
오후, 옥곡에 커피 배송했다. 조감도에 인터넷 이상이 생겨 들렀다. 그 전에 KT에 접수했고, 포스 관련 업체에서 직원 한 분이 왔다가 갔다. 분명히 인터넷이 이상이 있었지만, 양쪽 모두 자기네 문제가 아니라며 상대에 떠넘기기만 했다. 나중에 포스 관련 일을 하는 처남이 와서 다시 확인하니 인터넷이 문제였다. 여기는 카페라 신호를 받아들이는 모뎀이 문제였다. KT에 연락하여 광케이블로 전환하겠다며 신청했다. 이 일로 고객 몇 분은 카드사용에 있어 중복된 것도 있어 나중에 바랐다. 처남이 없었으면 이 일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저녁, 단재의 ‘조선상고사’를 읽었다. 수두시대 제1장 고대조선 총론에서 제3장 수두의 전파와 문화의 발달을 읽었다. 조선 민족의 구별과 활동 범위로 시작해서 단군 연대의 고증까지다. 여기서 인상 깊은 글은 이두표기다. 우리의 상고시대에는 조선 문자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 증거를 찾을 수 없다. 그러니 한자를 들여서 썼을 것이라며 추증한다. 하지만 이 한자 표기는 우리말과 중국 문자가 달라 한자의 음이나 뜻을 빌려 이미 이두를 만들어 써왔다는 것이다. 흔히 이두를 신라 설총의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설총 이전에 진흥왕순수비 같은 비문에도 이두로 적은 노랫말이 나온다. 그 외 지역명이라든가 또 단군왕검이라 할 때 왕검은 이두식 표기방법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즉 왕검王儉이라 할 때 ‘왕’은 임금에서 초반부를 취했으며 ‘검’은 글자소리 전부를 취해 금으로 읽는다.
우리의 옛사람이 1천 년간이나 이두를 쓰면서도 문제점을 개선하지 못한 원인에 대해서도 단재는 학문적 역량 때문이 아니라 주로 정치적 장애 때문이라 했다. 그러니 신라 사람이 고구려 사람의 이두를 모르고 동부여 사람이 북부여의 이두를 알 리가 없다. 지역마다 다른 방언도 한몫했을 것 같다. 즉 시간과 공간의 차이는 한 뿌리였던 우리의 언어가 뒤죽박죽이었던 셈이다.
하기야, 이런 점을 빌어 본다면 후대에 세종께서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제일 먼저 착수했던 한글 간행사업이 ‘동국정음’이었지 않았던가! 전국 지역마다 중국의 한자 발음이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대로 오르면 더 심화하였으면 했지 못했을 거로 생각지는 않는다.
늦게 조감도 모 군이 전화 왔다. ‘본부장님 가불 좀 되는지요?’ 월초에도 가불이 나간 상황이라 말 일에 월 마감 끝내고 나서 상황을 보자고 했다. 이번 달 조감도 직원은 휴가가 길어서 조금 걱정이다. 휴가 없는 본점 직원에 비하면 조건은 훨씬 좋지만, 근무에 임하는 자세는 무언가 못마땅하게 보인다.
오늘 부가세 ○백만 원 냈다. 본점에 새로 들어온 정식교육생 있었다. 영대 모 교수와 모 학생께서 신청했다. 커피 첫 수업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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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록님의 댓글

반갑습니다.// 오우~~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
오영록님의 댓글

한곳에서 34년을 같은 업종을 하다보니 이 사무실 저 사무실 이사장님 저 사장님 그 밑에 직원들 다 성격파악이 됐다. A사 사장님 이하 직원은 성격이며 행동이며 모든 것이 A타입으로 변했고 B사는 B사 사장의 스타일로 B형으로 바뀌었다. 어쩌면 살아남기위한 무의식의 변화인지도 모르겠지만 가장큰 역활은 오너의 품성대로 직원들도 따라 변하더라는 말이다. ///
직원이야기가 나와서 언듯 생각이 났습니다.// 그 직원의 행동거지가 지금은 조금 그렇다쳐도 머잖아 아주 훌륭한 가치관으로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직원들 모두 이선생의 인품을 닮을 것이라는 확신이 섭니다./ 오늘은 이선생을 일기를 접하니 저도 마음 한번 다잡고 시작해 보겠습니다.// 꽃무늬 양산 아래 얼굴은 모두 꽃무늬지요.. 더운날 건강하시고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