鵲巢日記 16年 08月 11日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鵲巢日記 16年 08月 11日
맑았다.
이른 아침 조감도에서 아내 오 선생과 커피 한 잔 마셨다. 카페 조감도 수입과 지출에 관해 의논을 가졌다. 압량초등학교 앞에 자리한 문구점에 다녀왔다. 문구점을 운영하시는 전 씨는 가끔 카페에 오시기도 한다. 지난주 토요일 아침에 따님과 함께 다녀갔다. 전 씨는 조감도 내부 분위기는 단순한데 꼭 그렇지도 않다며 얘기했다. 이유는 1층에 놓인 무대가 왠지 공간을 무겁게 한다며 얘기했다. 전 씨 가게는 고양이가 여러 마리 있다. 암컷 두 마리 수컷 한 마리다. 한 암컷이 새끼를 가졌는지 배가 엄청 부르다. 아무래도 이번 주 중에는 새끼 놓을 것 같다. 전에는 다른 암컷이 새끼를 가져 출산한 적도 있었다. 네 마리 낳았는데 문구점을 찾는 고객에게 한 마리씩 분양하기도 했다.
오후, 세빠에 생두 블루마운틴을 배송했다. 한학촌과 옥곡에 커피 배송했다. 조감도 정직원 모집 소식에 옥곡 분점장은 바리스타 한 분을 소개했다. 내일 면접 보기로 했다.
이덕일 선생께서 쓰신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었다. 오늘도 약 100쪽 읽은 것 같다. 효종 때 정치 상황을 얘기하자면, 북벌과 대동법 시행을 들 수 있겠다. 대동법 시행을 두고 서인은 분당하게 된다. 대동법 시행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한당(漢黨)과 격렬하게 반대하는 산당(山黨)이 있었다. 한당의 중심 인물은 김육과 조익 등이었고 산당의 중심인물은 김집과 송시열, 송준길 등이다. 한당의 영수 김육이 한강 이북에 살았기 때문에 한당으로 불렀고, 산당의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은 화덕, 연산 같은 산림에 살았으므로 산당이라 했다. 뿌리는 같은 서인이지만, 대동법에 대한 견해로 분당한 것이다.
광해군 즉위년(1608)에 처음 실행했던 대동법은 숙종 3년(1677)에 경상도, 34년(1708)에 황해도에 실행함으로써 꼭 100년 만에 전국에 확대 시행되었다.
이 책의 200쪽까지는 북벌에 관한 효종의 정책과 시행에 관한 신하들의 반대, 그러면서도 이를 시행하는 효종과 신하와의 갈등,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예송논쟁은 조선이 얼마나 문치주의였는가를 볼 수 있었다.
예송논쟁은 효종의 죽음을 두고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 조 씨의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정권을 잡은 서인은 이를 1년으로 정했고 남인은 3년 상을 치러야 한다는 논박이다. 서인의 주축은 송시열이었으며 남인은 윤휴와 윤선도가 있었다. 송시열과 윤선도는 봉림대군의 스승이기도 하다. 하지만 둘은 정치적으로는 당이 달랐으며 나중은 치열한 싸움으로 치닫게 된다. 정권을 잡은 세력은 서인이었기에 당시 현종은 남인의 상소에 마음은 있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3년 상을 치렀으면 예송논쟁은 없었을 테지만, 남인의 영수라 할 수 있는 송시열은 오직 사대부의 처지로 너무 소극적인 예우에 거치고 말아 생긴 일이다. 더 나가 예송논쟁은 왕위의 계승문제가 적법한가! 문제로 치닫고 장자, 적자, 서자라는 분쟁 어린 말과 적통과 종통, 조종에 관한 문제를 일으켰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종법이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러한 종법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핵가족화한 사회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예보다는 실리를 더 추구한다. 이러한 사회에 사는 것은 너무 각박하다. 3년 상이 아니라 삼일장으로 속도를 이룬 사회, 성리학과는 거리가 먼 실리적 국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만약 조선 중기의 사회가 이러한 예송논쟁이 아니라 더욱 실리적인 사회를 이루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댓글목록
오영록님의 댓글

잘 감상하였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주말이면 더위가 조금 수그러 진다니 다행입니다.
연휴 잘 보내시구요..~~